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총재. /EPA=연합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총재. /EPA=연합

세계적인 긴축통화정책 흐름에서 벗어나 나홀로 금리 역주행을 펼치던 일본이 궤도 수정에 나섰다. 단기금리는 -0.1%를 유지하되 장기금리는 0%에서 ±0.25%였던 변동 용인폭을 ±0.5%로 확대한 것이다.

26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일본은행(BOJ)은 지난 20일 금융정책결정회의를 열어 이 같은 내용으로 금융완화 정책을 일부 수정했다.

일본은행은 그동안 10년물 국채 금리가 0.25%를 넘지 않도록 해왔다. 변동 용인폭 이상으로 시장 금리가 올라갈 조짐을 보이면 공개시장조작에 나섰다. 무제한 국채 매입을 통해 이를 억제한 것이다.

시장에서는 일본은행의 통화정책 변화가 내년 4월 구로다 하루히코(黑田東彦) 총재의 퇴임 이후에나 시작될 것으로 예측하고 있었기 때문에 충격은 컸다. 일각에서는 10여 년간 지속돼온 초저금리 정책에 종지부를 찍었다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이처럼 일본은행이 깜짝 발표를 내놓은 배경으로는 미국과 일본의 금리 격차 확대에 따른 채권시장의 기능 저하가 거론되고 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올들어 7차례나 기준금리를 인상한데 비해 일본은행은 경기 활성화를 목적으로 금융완화를 유지해왔다.

이 같은 통화정책의 차이는 미국과 일본의 금리 격차를 더욱 벌렸고, 일본 국채의 투자 매력도를 떨어뜨려 결국 일본은행의 보유분만 늘어나는 시장 왜곡 현상이 나타났다. 실제 지난 9월 말 기준으로 일본 국채 발행잔액 1006조6139억엔 가운데 처음으로 절반 이상을 일본은행이 보유하게 됐다. 지난 6월 말 49.6%에서 50.3%로 늘어난 것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물가의 가파른 상승, 무역적자 확대 등을 유발해온 나쁜 엔저 효과에 대한 우려도 이번 조치의 원인으로 작용했다. 일본은행의 금융완화는 과도한 엔저를 초래해 올해 초 달러당 115엔 수준이던 엔화가치는 지난 10월 32년 만에 최저치인 151엔까지 떨어졌다.

엔저는 수입물가를 높이는 요인이다. 여기에 국제 원자재 가격이 오르면서 디플레이션의 대명사로 불렸던 일본에서도 가파른 물가 오름세가 나타났다. 지난 1월 일본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0.6%였지만 9월에 3%를 돌파한데 이어 10월에는 3.6%를 기록했다. 이는 40년 8개월 만에 최고치다.

악재는 꼬리를 물고 이어져 지난달 일본의 무역적자는 2조274억엔으로 11월 기준 역대 최대 규모를 기록했다. 이로 인해 올해는 42년 만에 경상수지 역시 적자가 확실시 되고 있다.

특히 일본은행이 시장의 예상보다 빨리 통화정책 전환을 시도하면서 글로벌 금융시장에는 쓰나미급 후폭풍이 몰아닥칠 것으로 우려되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일본은행이 크리스마스를 훔쳤다"고 보도했고, 블룸버그통신은 "구로다 쇼크가 시작됐다"고 전했다. 일본의 기관투자자들이 해외 주식과 채권을 대대적으로 팔아치우면서 글로벌 금융시장에 충격을 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일본의 장기금리가 인상되고, 이에 따라 엔화 역시 평가절상되면 엔 캐리트레이드 자금이 급속히 청산될 가능성이 높다. 엔 캐리트레이드는 일본의 기관투자자들이 초저금리로 엔화 자금을 빌려 달러나 기타 통화로 바꾼 뒤 그 자금을 해당 국가의 주식이나 채권 등에 투자해 수익을 올리는 것을 말한다.

일본은 세계 최대의 순대외자산 보유국이다. 일본 기관투자자들이 해외 주식·채권에 투자한 자금만 3조 달러(약 3860조원)를 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이 가운데 일본이 미국에 투자한 자금은 253조엔(약 2460조원)으로 미국 국내총생산(GDP)의 7.3%에 달한다. 네덜란드는 9.5%, 호주는 8.3%, 그리고 프랑스는 7.5%에 이른다.

엔 캐리트레이드 자금이 청산돼 일본으로 회귀할 경우 주요국의 국채 금리 상승과 증시 하락은 불가피하다. 해외에 있는 일본 자금의 본국 송환이라는 점에서 신흥국에서도 연쇄적인 파급효과를 불러일으킬 공산이 크다.

우리나라의 경우 엔화 강세로 인해 수출시장에서 가격 경쟁력이 높아질 수 있다. 하지만 만성적인 대일 무역적자가 더 커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대외 의존도가 높은 우리나라로선 방심할 수 없는 것이다. 엔·달러 환율은 지난 20일 131.7엔으로 하루 새 3.78% 하락했는데, 조만간 125엔까지 평가절상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저작권자 © 자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