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프리존]'우울이 날 집어삼켰어...' 기형도를 생각나게 한 죽음
[자유 프리존]'우울이 날 집어삼켰어...' 기형도를 생각나게 한 죽음
  • 박석근 문화 에디터
  • 승인 2017.12.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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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이니 종현의 자살- 기형도와 장 아메리                           

 [박석근/본보 문화에디터·소설가]

"난 속에서부터 고장 났다. 천천히 날 갉아먹던 우울은 결국 날 집어삼켰고 난 그걸 이길 수 없었다. …… 이만하면 잘했다고 고생했다고 해줘. 웃지는 못하더라도 탓하며 보내진 말아줘. 수고했어. 정말 고생했어. 안녕.”

이런 유서를 남긴 채 또 한 명의 아티스트가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 샤이니 멤버 종현은 이제 고인(故人)이 되었고 대중은 더 이상 그의 춤과 노래를 보고 들을 수 없게 되었다.

샤이니 ‘광팬’인 필자의 고등학생 딸은 그 소식을 듣고 제 방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근 채 식음을 전폐하고 있다. ‘베르테르효과’가 딸에게 전이되지 않을까 걱정이다.

필자가 문학청년 시절에 만난 시인 기형도는 다음과 같은 시를 남긴 채 심야극장에서 삶에 종지부를 찍었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故 기형도 시인
故 기형도 시인

시인 기형도의 모습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만약 그가 죽지 않았다면 가끔 만나 대폿집에서 막걸리 잔을 기울이며 함께 늙어갈 터인데 아쉽기 그지없다.

필자는 기형도를 중앙일보에 처음 만났다. 필자와 비슷한 연배였지만 당시 그는 언론고시에 합격해 기자가 되었고, 이미 등단한 시인이었다. 그 시절 필자는 해마다 신춘문예에 작품을 응모했고 번번이 낙방의 고배를 마셨다. 그러던 어느 해 우편사고가 염려 돼 필자는 중앙일보로 직접 작품을 들고 갔다. 그런데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하고 젊은 기자 하나가 다가와 작품을 받으며 거꾸로 필자에게 인사 하는 게 아닌가. 그가 바로 기형도였다. 그 후 문단에 등단한 필자는 때때로 공석에서 그를 만났고, 그해 가을에는 귀가 길이 도저히 복기되지 않을 정도로 함께 대취하기도 했다. 시인 기형도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가 상대방에게 수고 많았다는 말을 습관처럼 한다는 사실을 안다. 자살 소식을 접한 뒤 필자는 때때로 그의 말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라는 의미를 되새기곤 했다.

샤이니 종현의 유서에도 비슷한 대목이 나온다. “그냥 수고했다고 해줘. 이만하면 잘했다고 고생했다고 해줘. 웃지는 못하더라도 탓하며 보내진 말아줘. 수고했어. 정말 고생했어. 안녕.” 사람들은 눈치 채지 못했지만 당사자는 안간힘을 다해 견디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필자 주변에 자살자가 은근히 많다. 젊었을 때 친구의 누나는 분신자살했다. 친구는 그 광경을 목격했다. 불길에 휩싸인, 서른도 안 된 처녀의 모습은 처참하기가 이를 데 없었을 것이다. 필자는 죽음의 이유를 물었지만, 친구는 모른다고만 했다. 행정고시를 준비하던 그 친구는 결국 목사가 되었다.

몇 해 전에는 어머니 친구의 손녀가 아파트 옥상에서 뛰어내렸고, 최근에는 중소기업 사장인 동창생 아내가 아파트 베란다에서 뛰어내려 삶을 마감했다. 사례는 그밖에 또 많지만 이쯤에서 생략하자.

통계청 발표에 의하면 한국의 자살률은 인구 10만 명 당 30명으로 OECD 회원국 중 단연 1위다. 자살이 사회적 문제가 된 지는 오래다. 정부와 사회의 다각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개선의 기미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우울증의 원인은 다양하다. 밝혀진 바로는 우울증은 마음의 병이 아니라 육체의 병이라는 것이다. 환자를 둘러싼 환경과 심리가 원인이라고 보았으나, 최근에는 유전적 요인도 무시할 수 없다고 한다. 누나가 분신했다는 필자 친구의 경우, 자살은 그 집안 내력이었다. 자살유전자를 강조하면 과학만능의 ‘결정론자’가 될 우려가 있으므로 경계해야 한다.

확실한 것은 병이 회복되듯 우울증 또한 치료가 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병을 앓고 있는 동안 환자는 동굴에 갇힌 사람처럼 아무런 빛도 보지 못한다. 이른바 우울증의 ‘터널비전’ 현상이다.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은 그토록 심각하다. 대체 불가능한 단 한 번뿐인 삶의 주인공인 ‘나’의 존재 인식을 우리는 ‘실존’이라 한다. 나는 누구인가? 우연히 존재하는가? 필연적으로 존재하는가? 실존철학은 이 문제에 대해 깊이 성찰한다.

자살담론은 그 역사가 꽤 깊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자살을 시민사회를 파괴하고 국력을 약화시키는 범죄라고 말했다. 반면에 자연과의 조화를 중시하는 스토아학파는 인간은 스스로 죽을 자유가 있다고 피력했다. 사람이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다면 이는 자연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상태이며 따라서 차라리 스스로 삶을 포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세네카는 자살을 ‘자유의 통로’라 표현하기까지 했다.

로마시대에는 자살은 금지되었다. 로마는 식민지 개척과 전리품의 유입으로 유지되는 제국이었다. 만약 자살이 유행하면 노예의 숫자가 줄어들고, 그것은 곧 국가재정의 손실로 이어지기 마련이었다. 거기다 하느님으로부터 목숨을 받았다는 기독교 사상까지 퍼져 자살은 죄악시 되었다.

중세에는 더욱 더 자살을 죄악시했다. 하느님이 주신 목숨은 절대적 것이어서 만약 자살하면 지옥에 떨어진다. 자살자는 장례식을 치루지 않고 묘지를 쓸 수 없다. 또 그 시신은 들짐승이과 날짐승의 밥이 되어 마땅하다. 심지어 국가는 자살자의 재산을 몰수했으며, 자살을 시도했다가 실패한 사람에게는 형벌이 가해졌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살은 ‘용서받을 수 없는 살인’이며, 비록 삶의 고통이 따르더라도 견뎌야 하고 인간은 마땅히 신이 부르실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설파했다.

인간의 개별성이 싹트기 시작한 르네상스 시대에 오면 생각이 좀 바뀐다. 인간에게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 있다면 자살할 수도 있다.

근대 계몽주의 철학자 칸트는 자살의 자유를 소극적으로 인정했다. 칸트는 인간에게 자살의 자유는 있지만, 국가가 그것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 자살은 ‘극단적인 자유’일 뿐이다.

현대에 와서 가장 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사람은 장 아메리였다. 그에 대한 이야기가 <자유죽음>이란 제목을 달고 얼마 전에 국내에서 출간되었다. 장 아메리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철학과 문학을 공부했고 작가가 되었다. 나치가 벨기에를 점령했을 때 레지스탕스로 활동하다가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고문을 당했다.

그는 아유슈비츠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아이러니하게 그런 그가 자살로 삶의 종지부를 찍었다. 그의 사상에 따르면 자살은 더 이상 삶의 가치가 없다고 느끼는 사람들의 '존엄한 선택'이다. 우울한 자들이 저지르는 비행이 아닌 것이다. 자살은 존재를 괴롭히는 ‘도전’에 대한 ‘응전’이다.

필자는 장 아메리의 자살론을 옹호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책을 다 읽고 난 뒤 다만 이런 생각 하나가 고개를 들었다. 개똥밭에 굴러도 저승보다 이승이 낫다는 말은 비루한 인간들이 만든 말이 아닐까.

존엄사는 자살의 한 종류이다. 근래 들어 안락사에 관한 논의가 활발히 전개되고 있다. 우리나라 형법은 안락사를 ‘자살관여죄’의 하나로 처벌하는 규정을 두고 있다. 그렇기는 하지만 일정 요건을 충족하면 범죄구성요건(犯罪構成要件)을 조각(阻却)한다는 게 다수설이었다. 형법학계의 이러한 학설에 호응하여 몇 년 전에 대법원은 존엄사의 허용기준을 마련했다. 환자가 회복 불가능한 단계에 진입하였고, 연명치료 중단에 대해 환자가 사전에 동의했을 것, 그런 의사가 없을 경우 환자의 평소 가치관·신념 등에 비춰 추정될 것, 사망단계 진입여부는 전문의 등으로 구성된 위원회가 판단할 것 등을 제시했다.

대중문화가 산업이 된 지는 오래되었다. 우리나라의 연예산업, 특히 K-팝은 철저한 경쟁 구조 속에 있다. 인기를 얻으면 살고 인기를 얻지 못하면 바로 도태된다. 아이돌들은 기획사의 관리를 받으며 혹독한 연습생 시절을 거친다. 그런 소년·소녀들 가운데 소수만이 경쟁을 뚫고 스타로 탄생한다. 마치 공장에서 기계를 생산하듯 스타가 제조되어 꼭두각시인형처럼 회사의 스케줄에 따라 움직인다. 연예산업의 어두운 이면이다. 이렇듯 K-팝의 화려한 무대 뒤에 인간의 존엄이 훼손되고 있다.

샤이니 멤버 종현의 자살이 여러 상념을 불러일으킨다. 故 종현의 발인이 끝난 후에도 팬들은 장례식장을 떠나지 못하고 오열하며 서로를 위로했다고 뉴스는 전한다. 종현의 죽음에 장 아메리가 떠오른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지금 필자의 뇌리에 그 두 사람의 말이 겹친다. “자살은 침울한 사람이 저지르는 비행이 아니야. 어디까지나 존재를 괴롭히는 ‘도전’에 대한 ‘응전’일 뿐. 그냥 수고했다고 해줘. 이만하면 잘했다고 고생했다고 해줘. 웃지는 못하더라도 탓하며 보내진 말아줘. 수고했어. 정말 고생했어.”

샤이니 ‘광팬’인 딸이 아직 방에서 나오지 않고 있다. 죽음의 인식은 인간을 성숙하게 만든다. 필자의 딸도 그럴 것이다.

sgp@jay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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