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광
장석광

추위가 한풀 꺾인 틈에 잠시 산책을 나갔다가 팝콘 냄새에 이끌려 영화관을 찾았다. 블라디보스톡 연추에서, 하얼빈 역사(驛舍)에서, 여순 감옥에서 부단히 흔적을 쫓았던 그가 거기 있었다. 대한의군 참모 중장 안중근, 그를 그린 뮤지컬 영화 ‘영웅’이었다. ‘나라 위해 싸운 우리 누가 죄인인가! 우리를 벌할 자 과연 누구인가!’ 영화가 끝나고도 배우들의 합창소리가 한참동안 귀에서 떠나지 않았다.

2022년 12월 12일, 이스라엘의 해안도시 헤르츨리야에 국민영웅으로 추앙받는 전설적 스파이 이름을 딴 ‘엘리코헨 국립박물관’이 개관했다. 엘리 코헨의 유가족, 헤르초그 대통령, 네타냐후 총리, 바니아 모사드 국장, 패드론 헤르츨리야 시장 등이 참석한 개관식은 시종 엄숙한 분위기에서 진행됐다.

헤르초그 대통령은 "이스라엘의 영웅,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스파이 엘리 코헨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고자 하는 이스라엘의 모든 전사들에게 그들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우리는 오늘 지어진 이 박물관이 유가족들에게 자부심을 심어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기념사를 했다. 네타냐후 총리는 유가족들에게 "시리아로부터 엘리의 유해를 반드시 송환하겠다는 우리의 약속에는 기한이 없다. 이것은 우리의 영원한 약속이다"며 유해 송환을 재삼 다짐했다. 바니아 모사드 국장도 "모사드의 모든 요원들은 성스러운 이곳에서 엘리 코헨의 헌신과 통찰을 배울 것이다"라며 엘리 코헨의 희생을 잊지 않았다. 엘리 코헨의 부인 나디아 코헨은 "엘리는 좌파든 우파든 상관하지 않았다. 오직 이스라엘 국민을 위해 일했다. 나는 엘리를 사랑하는 이스라엘 국민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며 남편을 추억했다.

박물관에는 엘리 코헨의 결혼사진, 가지고 다녔던 가방, 해외에서 가족에게 보낸 엽서, 정보교육 수료증, 시리아에서 입었던 예복, 시리아 정보부가 보낸 엘리 코헨의 마지막 편지 등 출생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엘리 코헨의 모든 것들이 전시되고 설명이 따랐다. 박물관은 40분 견학코스를 지나면 누구나 엘리 코헨을 경험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사진 한 장이 천 마디 말보다 낫고 경험 한 번이 사진 천 장보다 낫다. 박물관은 학생들과 군인들의 필수 견학코스가 되어가고 여행자들의 관광명소가 되어갈 것이다. 모사드는 이렇게 전설이 되어간다.

2022년 10월 1일, 블라디보스톡에서 북한공작원에 의해 피살된 최덕근 영사의 26주기 추모행사가 국정원 보국탑에서 있었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유가족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현직들도 전직들도 국정원의 그 누구도 유가족들과 연락이 닿지 않았다. 행사에 참석한 한 인사는 "연평해전 어느 유가족처럼 국가의 홀대를 견디다 못해 이민을 가버린 건 아닐까?" "천안함 유가족처럼 정권으로부터 모함과 냉대를 받았던 건 아닐까?" 안타까워했다.

그리고 2주 뒤인 10월 15일, 우리나라 최초의 특수부대인 호림특수부대 제73주기 전몰장병 위령제가 국립서울현충원에서 거행됐다. 두 달 앞서 8월 14일, 윤석열 대통령이 ‘이름 없이 스러져간 영웅들을 우리는 끝까지 기억해야 한다’며 국가원수로서 최초로 부대의 존재를 인정했을 때 유가족들은 감격하고 감읍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국가는 위령제에 그 흔한 추모 화환 하나 보내오지 않았다. 보훈처에 수차례 행사 사실을 알렸고, 보훈처장에게는 등기우편까지 발송했었지만 돌아오는 건 허탈한 마음뿐이었다.

안중근 순국 112년, 아직도 그의 유해는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나라 위해 싸운 우리 누가 죄인인가! 우리를 벌할 자 과연 누구인가!’ 배우들의 합창소리가 아직도 들리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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