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 방어에 결정적 역할…초기 열세 극복하고 국난 극복의 전적지 돼"

문화재청이 전라북도 완주군·진안군에 위치한 '임진왜란 웅치 전적'을 국가지정문화재 사적으로 지정했다고 30일 밝혔다. 임진왜란 웅치 전적은 임진왜란 초기(1592년 7월) 전라도를 침략한 왜군에 맞서 관군 및 의병이 민관 합동으로 호남을 지켜낸 '웅치 전투'가 발생한 곳이다. 사진은 임진왜란 웅치 전적 전경. /연합
문화재청이 전라북도 완주군·진안군에 위치한 '임진왜란 웅치 전적'을 국가지정문화재 사적으로 지정했다고 30일 밝혔다. 임진왜란 웅치 전적은 임진왜란 초기(1592년 7월) 전라도를 침략한 왜군에 맞서 관군 및 의병이 민관 합동으로 호남을 지켜낸 '웅치 전투'가 발생한 곳이다. 사진은 임진왜란 웅치 전적 전경. /연합

임진왜란 때 조선의 관군과 의병이 힘을 모아 왜적에 맞서 싸운 '웅치 전투'의 전적지(戰蹟地·전쟁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가 국가지정문화재가 된다.

문화재청은 전북 완주군과 진안군에 있는 '임진왜란 웅치 전적'을 사적으로 지정했다고 30일 밝혔다.

웅치는 완주군과 진안군 사이에 있는 고갯길을 일컫는 지명이다. 웅치 일대의 옛길은 전주와 진안 등을 연결하는 중요한 교통로로 이용됐으며, '선조실록' 등 여러 문헌에는 '웅현','웅령'으로 기록돼 있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 7월 조선의 관군과 의병은 이곳에서 왜군에 맞서 치열한 전투를 벌인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당시 충남 금산에 주둔하고 있던 왜군이 전주를 공격하려 하자 나주판관 이복남, 김제군수 정담, 남해현감 변응정, 의병장 황박 등이 험한 지형을 이용해 적을 격파했다. 전열을 다시 가다듬은 왜군이 재차 공격하자 수적인 열세에 밀린 이들은 결사적으로 싸웠다.

치열한 접전 끝에 정담 등도 전사했으나 일본군 역시 많은 전력을 상실해 이후 전투에서 진안으로 퇴각했다가 금산으로 돌아갔다.

초기의 열세를 극복하고 끝내 승전하게 되는 실마리를 제공한 웅치 전투는 국난 극복의 전적지로 평가된다.

학계는 웅치 전투를 임진왜란 초기 조선 팔도 가운데 마지막까지 일본군이 점령하지 못했던 호남을 지켜내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된 전투로 호남 방어에 큰 역할을 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전투는 '조선왕조의 발원지'로 여겨지는 전주 일원을 지키는 데에도 큰 역할을 했다.

전주사고(史庫·국가의 중요한 서적을 보관하던 서고)에 보관된 조선왕조실록과 경기전에 봉안된 태조 어진(御眞·왕의 초상화)이 안전하게 보전된 것도 웅치 전투의 영향이 크다.

최근에는 약 726만 명의 관객을 동원한 영화 '한산: 용의 출현'에 등장해 대중의 관심을 끌기도 했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전라도를 침략한 왜군에 맞서 관군과 의병이 민관 합동으로 호남을 지켜낸 전적지"라며 "이후 전쟁에 필요한 각종 물자를 호남으로부터 조달하는 등 임진왜란 극복의 계기를 마련했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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