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미국무부의 좌우합작 압력

1946년 2월 북한 정권 출발
미 국무부, 좌우합작 주도
이승만, 좌우합작은 공산화
이승만, 남한 단독정부 추진
‘정판사 위폐사건’ 좌익 타격
이승만 정읍발언 실천 국민운동
김규식·여운형 좌우합작 파트너

류석춘
류석춘

1946년 5월 6일 미소공위 결렬은 ‘남북한 통일정부 수립’이라는 대중적 당위에 대한 희망이 무너져 내리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1946년 3월 20일 미소공위가 시작할 때부터 이미 상황의 전개를 우울하게 예측하고 있었다. 소련의 야욕에 미국이 적절히 대처하지 못하면 협상의 결과로 한반도 전체가 공산화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이승만의 걱정은 두 가지 사실로부터 비롯된다.

하나는, 소련이 이미 북한에 김일성 정권을 세웠기 때문이다. 1946년 2월 출범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 김일성은 3월 공산혁명의 첫 과제인 토지개혁을 이미 해치운 상황이었다. 북한이라는 ‘(인민) 민주주의 기지로부터 국토를 완정해 한반도 전체를 공산화’하는 과업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쉽게 말해 남한의 적화만을 남겨둔 상황을 이승만은 우려했다.

다른 하나는, 미국의 한반도 정책이 현지의 미군정 판단과 본국 국무부 판단 사이에서 일관성을 잃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로 대표되는 미군정은 신탁통치 반대를 표명한 우익 ‘민주의원’을 지원하면서 소련의 적화 야욕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러나 미 국무부 입장은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에 따른 신탁통치를 강조하며 ‘좌우합작’을 추진하고 있었다.

1946년 3월 20일 덕수궁 석조전 회의실에서 열린 첫 회의를 마치고 나온 미소공동위원회 대표단 모습. 앞줄 왼쪽부터 주한미군사령관 하지 중장, 소련 측 수석대표 스티코프 중장, 코르쿨렌코 소련 대표. 둘째 줄 왼쪽부터 발라사노프 (Gherasim M. Balasanov) 소련 대표, 소련 실무 간부, 미소공위 미국 수석대표 아놀드 (Archibald V. Arnold) 소장, 레베데프 (Nicolai G. Lebedev) 소련 대표 등이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출처: 뉴시스 2020 3 8). https://mobile.newsis.com/view.html?ar_id=NISX20200305_0000943604#_enliple

이승만은 오락가락 하는 미국의 이중적 태도 중간에서 줄타기를 해야 했다. 순수한 군인이었던 하지를 자신과 같은 정무적 판단을 하도록 돌려 세우는데 성공한 이승만이었지만, 1946년 미소공위가 진행되던 당시 트루먼 정부의 미 국무부는 2차대전의 동맹국 소련과의 협조를 강조하며 이승만을 따돌리고자 했다. 국무부는 이승만과 김구 등 신탁통치 반대 세력을 과격하다며 정치 현실에서 퇴장시키려 했다.

소련과의 협조를 위한 미국의 정책을 생산하는 기구는 국무부-육군-해군으로 구성된 ‘3부 조정위원회’ (State-War-Navy Coordinating Committee: SWNCC) 였다. 이승만은 이 기구에서 만들어져 현지 책임자인 하지에게 내려오는 본국의 훈령 때문에 딜레마에 빠지곤 했다. 국무부의 좌우합작 훈령을 받아들이자니 소련이 남한을 적화시키는 일이 걱정이었고, 반대하자니 소련의 기피인물로 낙인찍혀 정치에서 밀려나는 현실을 피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딜레마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떠오른 대안이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이었다. 하지와 이승만은 이에 대한 여론의 흐름을 떠볼 필요가 있었다. 사전에 두 사람과 교감한 결과였는지 알 수는 없지만, 김성수가 3월 22일 단독정부 문제를 최초로 공론화했다. 그러나 이승만을 절대적으로 지지하던 한민당 수뇌부마저도 반대했다. 이어서 동아일보가 4월 7일 외신을 인용하는 방식으로 단독정부 가능성을 대중에 퍼뜨렸다. 그러나 역시 여론은 싸늘했다.

5월 8일 미소공위 결렬은 단독정부 대안을 부상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결렬 1주일 후인 5월 12일 단독정부 문제는 다시 시험대에 올랐다.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 ‘독립전취국민대회’ 행사에서 김규식은 폭탄선언을 했다. 민주의원 의장대리 자격으로 그는 "38선을 그대로 두고 38선 이남에서 한인만으로 정부를 만들면 그 정부는 대구에 있든지 제주도에 있든지 통일정부다"고 발언했다 (손세일, 2015, 이승만과 김구, 제6권: 528, 조선뉴스프레스). 좌익은 남한 단정 계획이라며 격렬히 반발했다.

한편, 미국 정부는 미소공위가 무기휴회에 들어가면서 새로운 대한정책을 준비했다. 미소협상에서 현지의 군정이 임의로 행사하던 재량권을 없애고 본국 정부가 주도하는 협상방식을 채택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좌우합작을 통한 통일정부는 적화로 가는 길목이 될 뿐이란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자신의 소신을 대중에 확산시키는 지방순회를 이어갔다.

단독정부 구상을 수면 위로 띄우는 이승만의 노력이 이어지는 가운데 뜻밖의 사건이 불거지면서 결정적 반전의 기회가 만들어졌다. 미소공위 결렬 대략 열흘 후인 1946년 5월 15일 미군정 공보부는 박헌영이 이끄는 남한 공산당이 ‘조선정판사’라는 인쇄소 직원들과 짜고 위조지폐를 찍어 엄청난 액수의 활동자금을 사용한 사실을 공표했다. 공산당에 대한 여론이 악화되면서 좌우합작에 대한 기대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승만은 이 사건을 계기로 공산당을 코너로 몰 수 있었다.

대략 열흘 뒤인 5월 24일 ‘민주의원’ 조직을 도와주던 이승만의 측근 굿펠로우 대령이 본국으로 복귀하는 기자회견을 하면서 단독정부 가능성은 다시 한번 도마 위에 올랐다. 뉴욕타임즈 기사는 굿펠로우가 "만일 미소공동위원회 소련 대표단이 빨리 이곳에 돌아오지 않는다면 미국은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추진해야 할 것"이라 언급했다고 보도했다 (손세일, 2015. 『이승만과 김구』 6권: 535). 단독정부라는 지렛대를 활용해 소련을 압박하는 고단수 발언이었다.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을 보도한 동아일보 1946년 5월 16일 기사. ‘지폐위조 사건 진상 전모’ ‘위조 일당은 16명’ ‘전부가 공산당원’ ‘이관술, 권오직은 피신’ 제목을 달고 있다.

1946년 6월 3일의 정읍발언은 바로 이러한 일련의 상황을 거치며 이승만이 던진 회심의 한 수였다. "이제 우리는 무기휴회된 미소공위가 재개될 기색도 보이지 않으며 통일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케 되지 않으니, 우리는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삼팔 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공론에 호소하여야 할 것이니, 여러분도 결심하여야 될 것이다." (손세일 6권 540)

나라는 벌집을 쑤신 듯 시끄러워졌다.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과 공산당, 조선인민당, 신민당 등 좌익정파와 조선노동전국평의회 (전평), 전국농민조합총연맹 (전농), 부녀총연맹 (부총) 등 좌익단체들이 이승만을 공격했다. 심지어 김구의 자장 하에 있는 한독당 선전부장 엄항섭도 반대입장을 발표했다. 그러나 한민당 선전부장 함상훈은 이승만을 옹호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열광적인 반응의 지방순회를 이어간 이승만은 여세를 몰아 1946년 6월 10일과 11일 이틀 동안 서울 정동예배당에서 ‘대한독립촉성 국민회 2차 전국대표회의’를 열었다. 회의는 이승만을 총재 그리고 김구와 김규식을 부총재로 추대하고, 정읍에서 밝힌 이승만의 새로운 건국운동을 실천할 ‘민족통일총본부’ 결성에 관한 모든 권한을 이승만에게 위임했다. 이승만은 6월 29일 ‘민통총본부’ 책임자를 발표했다. 이승만이 총재, 김구가 부총재였다. 김규식이 빠졌다.

한독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승만과 김구의 신뢰는 두터웠다. 그러나 본국의 훈령에 따라 좌우합작에 시동을 건 미군정은 중도우익 김규식과 중도좌익 여운형을 파트너로 삼았다. 김규식이 빠진 이유였다. 좌우합작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미군정은 이승만과 김구를 퇴출시켜야 할 고집쟁이로 만들어갔다. 미국의 좌우합작 노력은 이때부터 1947년 3월 트루먼 대통령이 공산주의와의 전면적 대결을 선언하기까지 1년 가까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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