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묘(癸卯)년 새해부터 식품에 기존의 유통기한 대신 소비기한을 표기하는 ‘소비기한 표시제도’가 시행된다. 사진은 서울의 한 대형마트 진열대. /연합

통상 소비자들은 유통기한이 지난 식품을 두고 버려야 할지 고민에 빠진다. 비교적 양호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새해부터는 이 같은 고민을 할 필요가 없어진다. 앞으로 식품에 표기되는 유통기한이 폐지되고 소비기한 표시제도가 본격 시행되기 때문이다.

소비기한은 식품을 섭취했을 때 안전에 이상이 없는 기한을 말한다. 기존의 유통기한보다 20~50%가량 길기 때문에 음식물 쓰레기 처리에 들어가는 천문학적인 비용과 함께 탄소 배출량을 크게 줄일 수 있다.

1일 유통업계에 따르면 식품의약품안전처는 최근 32개 식품유형 180개 품목의 소비기한 참고값을 공개했다. 소비기한 참고값은 제조·유통사가 소비기한을 정할 수 있는 기준이 되는 값이다. 식품업체들은 이 참고값보다 짧게 제품의 소비기한을 설정하면 된다.

식품에 표기된 방법에 맞게 보관했다면 유통기한이 지났어도 소비기한 내 섭취하면 안전에 이상이 없다는 것이 식품의약품안전처의 설명이다. 실제 한국소비자원의 실험 결과에 따르면 유통기한이 지난 액상커피는 30일, 치즈는 70일, 식빵은 20일, 그리고 냉동만두는 25일까지 기준치 이상의 세균과 대장균이 검출되지 않았다. 즉 유통기한이 지난 식품을 섭취해도 문제 없다는 뜻이다.

식품의약품안전처가 제시한 주요 품목의 소비기한 참고값을 전제로 하면 가공두부는 유통기한 7~40일에서 소비기한은 8~64일로 늘어난다. 떡류는 유통기한 3~45일에서 소비기한 3~56일, 유통기한이 45일인 과자는 소비기한이 81일까지 연장된다. 우유가 들어가는 초콜렛 가공품 역시 유통기한 30일에서 소비기한 51일로 길어진다.

유통기한이 타제품보다 짧은 요구르트 등 가공유 제품도 유통기한 14~31일에서 소비기한 23~26일로 늘어난다. 유통기한이 15∼25일인 베이컨류는 소비기한이 16∼33일, 햄은 유통기한 30~45일에서 소비기한이 40~61일로 연장된다.

식품의약품안전처는 38년 동안 유통기한이 소비자와 업계에 오랜 기간 자리 잡은 만큼 혼란이 불가피할 것으로 예상됨에 따라 올해 말까지 1년의 계도기간을 뒀다. 또 우유와 요구르트 등 유제품의 경우 위생적 관리와 품질 유지를 위한 유통 시스템의 개선이 필요함에 따라 다른 품목보다 8년 늦은 2031년부터 소비기한을 적용하기로 했다.

지난 1985년 도입된 유통기한은 소비자들 사이에서 건강을 위해 지켜야 할 철칙으로 인식돼왔다. 하지만 유통·식품 제조기술의 발달로 발생하는 안전 문제가 대부분 해소된 상황임에도 유통기한이 지났다는 이유로 계속해서 음식물을 폐기하면서 막대한 경제적 손실과 환경문제가 제기돼 왔다.

식품의약품안전처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음식물 폐기량은 연간 548만톤이다. 이는 축구장 100개를 한꺼번에 덮을 수 있는 규모다. 처리비용도 매년 1조1000억원에 달한다.

소비기한 표기제도의 시행으로 정부와 유통업계는 경제적 효과가 상당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지난 2021년 식품안전정보원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소비자는 연간 8860억원, 식품·유통업계는 260억원 가량의 음식물 쓰레기 처리비용을 절약할 수 있다.

소비기한 표기제도는 세계적인 흐름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대부분이 시행하고 있다. 국제식품규격위원회(CODEX) 역시 지난 2018년부터 소비기한 표기를 권고하고 있다.

미국의 경우 소비기한을 포함해 유통기한, 품질유지기한, 판매기한 가운데 업체가 자율적으로 선택해 표기할 수 있는 유연한 식품 기한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주로 식품 보관법을 자세히 표기하는 품질 유지기한을 권장하고 있다. 유럽연합(EU) 역시 식품의 특성에 따라 소비기한, 품질유지기한, 냉동기한을 구분해 사용한다. 영국은 지난 2011년 소비기한과 품질유지기한을 도입하면서 유통기한 표기제도를 폐지했다. 일본은 소비기한과 함께 상미(嘗味)기한을 구분해 표시하고 있다. 상미기한은 식품의 맛이 최상의 상태로 보장되는 기간이다.

하지만 제도가 정착되기 전까지는 현장의 혼란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이에 식품의약품안전처는 계도기간 동안 유통기한을 병기한다는 방침이다. 또 소비기한 표기제도가 안정적으로 정착될 수 있도록 2025년까지 소비기한 참고값 등을 지속해서 확대·제공한다는 계획이다. 이를 통해 식품·유통업체 스스로 안전한 소비기한을 설정할 수 있도록 유도하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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