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GC '홍삼 세계지도'로 돌아 본 역사

뿌리깊은 유교가치관으로 상행위 천시...조공무역만 의존
여진족은 척박한 만주서 살아남기 위해 목숨 걸고 채취해

오랜 세월 최고의 품질을 자랑해온 한반도산 인삼. 최고의 약재 식재이자 건강보조식품으로 각광받았다. /한국인삼협회
세계 홍삼 지도. 작년 해외시장 매출 국가별 1위를 한눈에 볼 수 있다. /KGC인삼공사

한국인삼공사(KGC, Korean Genseng Corp.)가 ‘홍삼 세계지도’를 5일 공개했다. 정관장 홍삼의 작년 해외시장 매출 국가별 1위를 보여준다. 휴대·섭취가 간편한 스틱형 홍삼 제품 ‘에브리타임’이 아시아 여러 나라(일본·대만·홍콩·말레이시아·싱가포르·베트남 등)에서 1위, 특히 대만에선 점유율 38%를 자랑한다.

KGC에 따르면 동남아 지역의 수출 성장세가 두드러지며, 이는 한류 열풍이 낳은 다양한 K-콘텐츠 인기의 영향이다. 중국 1위는 ‘뿌리삼’ 제품, 정관장 뿌리삼이 중국제보다 3배쯤 비싸게 팔린다. 미국과 중동에선 농축액 ‘홍삼정’, 호주와 러시아에선 음료 형태 ‘홍삼원’이 최고다.

이 실적을 접하며 근대 이전 인삼의 국제정치학을 돌아보게 된다. 일종의 ‘전략 물자’였던 인삼이 몇 백년 전 동아시아 질서를 바꿨다. 오늘날 더욱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성리학 국가 조선의 신분질서 때문에 인삼 판도의 주도권이 여진족에게 넘어간 것이다. 인삼 무역으로 힘을 기른 여진족은 머잖아 명나라를 밀어내고 대륙의 주인공이 된다. 조선 초기 명나라 조공품의 으뜸은 인삼, 그 재배·유통을 국가가 관리했다. 18세기 인삼재배를 현실화 시키기까지 공급에 비해 수요는 턱없이 부족했다. 중국의 인삼 수요 증가에 따라 평안도·함경도 국경지역에서 인삼 분쟁이 자주 일어난다.

조선은 압록강변의 주요 인삼 채취 지역 4개 군(여연閭延·무창戊昌·우예虞芮·자성慈城)을 폐지했다. 그 건너편 땅 여진족의 침입이 잦았기 때문이었다. 인삼 채취를 위해 명나라 사람들과 여진족은 조선 국경을 넘나드는데, 그 안에선 1469년(세조) 왜(일본)와의 인삼 사(私)무역이 발각되자 부산·제포·감포 무역마저 엄금 당한다. 140여년 후 왜와의 무역 재개 때도 인삼 사무역만은 끝내 허용되지 않았다.

16세기 후반 들어 동북아 인삼 판도에 큰 변화가 온다. 당시 세상의 중심이던 명나라, 그 부유층들이 당대 최고 건강식품인 인삼을 찾았고 거대한 공급부족을 발생시킨 것이다. 만주의 여진족과 조선은 인삼을 둘러싸고 전혀 다른 길을 갔다.

조선이 사무역을 통제하며 조공무역에 의존한 반면, 여진족은 부족장까지 나서 상거래에 관여하는 등 명나라와의 교역에 힘썼다. 물산 자체의 품질 경쟁력은 조선이 우위였으나 장사는 여진족에게 밀렸다.

산삼이 고갈될 위기를 맞자 조선은 사무역을 더 옥죄는 쪽으로 나아간다. 1606년(선조) 평안도 삼산지에서 증명서 없이 거래를 할 수 없게 했고 해로·육로, 특히 명·여진과의 접경지역 검색을 강화했다. 16~17세기 ‘인삼 전쟁’의 최종 승자는 여진족이었다. 만주 인삼이 명나라 수요를 대고 남아 조선에 수출할 정도였다. 왜 그렇게 됐을까? 문제는 사회제도였다.

성리학 국가 조선에서 가장 천한 신분이 상공업이었다. 인삼의 국제가(價)가 아무리 치솟아도 더 이상 생산하지 않았다. 성리학적 관점에서 볼 때 ‘땀 흘리지 않고’ ‘큰 이윤을 남기는 상업’이란 부도덕한 행위였던 것이다.

여진족은 사정이 달랐다. 춥고 척박한 만주에서 교역으로 농산물을 얻기 위해 인삼 채취가 절실했다. 위험을 무릅쓰고 평안도까지 들어와 삼을 캐 명나라에 팔았다. 당시 삼과 은(銀)은 동일한 무게로 교환됐다.

조선의 사무역 금지로 여진족이 ‘어부지리’를 얻은 셈이다. 압록강 건너 건주여진의 지도자 누르하치가 존망을 걸고 인삼 채취와 무역에 나섰다. 결국 인삼 종주국 조선을 제친 여진은 ‘인삼 전쟁’에서 승리, 훗날 중국사 최고의 문물·생산력을 자랑하는 청나라를 건국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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