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퇴임사, 그 후...] 제자와 나를 이어 준 '히어리 꽃'
[어떤 퇴임사, 그 후...] 제자와 나를 이어 준 '히어리 꽃'
  • 최성재
  • 승인 2017.12.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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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假)리지널 ≪태양의 후예≫가 나오기 몇 년 전, 오리지널(original) 태양의 후예가 아프가니스탄에서 6개월간 평화의 씨앗을 뿌리고 서울로 돌아왔다. 그가 맨 처음 찾아간 곳은 자랑스러운 모교, 애국의 혼과 휴머니즘의 씨앗을 심어 준 등촌고(登村高)였다.

우리 태양의 후예는 ‘채송화 어린이 공원’의 시무나무 아래서 잠시 좌우를 살피더니, 성큼성큼 2차선 도로를 건넌다. 마침 교문 오른쪽 울타리 아래에서 말발도리가 하얀 웃음으로 반겨준다. 지킴이 아저씨가 다가간다.

“어떻게 오셨소? 군인으로 보이누만.”

“최성재 선생님, 뵈러 왔습니다. 1회 졸업생입니다.”

“난 월남 참전 용사라오. 어서 가 보시오.”

그냥 쭉 메타세콰이아 길을 따라 가려다가, 시간이 넉넉했던지라 서슴없이 좌향좌! 여기까지 와서 등촌의 자랑, 히어리를 모른 체할 수는 없다. 작은 솔밭 아래 히어리는 군인 손바닥만 한 잎들을 흔들며 알은체한다. 쪽동백의 나뭇잎과 비슷하지만, 잎이 조금 더 크고 잎맥은 그보다 훨씬 선명하다. 잎맥이 어째 ‘다나까’체의 군인 말씨를 닮은 듯하다.

“선생님, 저 00입니다. 보고 싶습니다. 오늘 오후 몇 시에 뵈러 가면 되겠습니까?”

“아, 그래, 00구나. 나도 보고 싶다. 6교시가 비니까, 2시쯤 오너라.”

‘그 동안 많이 자라 이제 내 키랑 비슷하구나. 다 크면 저 정도랬지, 아마.’

가까이 다가가서 이름표를 들여다본다. 학명도 적혀 있다.

‘학생들의 이름만 줄줄 욀 뿐 아니라 꽃과 나무의 이름도 줄줄 외더니, 우리 담임 선생님이 이렇게 나무마다 이름표도 달아 주셨지.’

‘한국에서만 볼 수 있다는 코리롭시스 코레아나(Corylopsis coreana), 지리산. 덕유산에서 귀밑에 잔설(殘雪)을 달고 봄을 알리는 꽃, 개나리가 피기 직전 몽글몽글 노랗게 피는 히어리, 고귀한 꽃, 눈이 시리게 아름다운 꽃이 등촌고에 한 그루 있다. 안녕, 히어리? 코리롭시스 코레아나, 히어리, 코리롭시스 코레아나... 내년 봄에는 꼭 히어리의 꽃을 보고 말리라.’

엄군의 카톡 편지
엄군의 카톡 편지

엄군이 얼마 전 내 부끄러운 퇴임사를 보고, 카톡을 보내왔다. 그대로 옮긴다.

“선생님, 어젯밤에 보내주신 글을 다시 한번 읽으며, 고등학교 때 추억을 회상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일주일에 한번 하는 훈화시간에 해 주셨던 말씀들, 그리고 추천해 주셨던 많은 책들, 전부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제가 성장하는데 있어서 밑거름이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최근 저 자신의 안위만 챙기느라 고등학교 때 다짐했던 좋은 사람이 되려는 노력은 부족하지 않았나 반성합니다. 지난 교직생활 동안 선생님이 가지셨던 철학을 존중하고 존경합니다. 저도 제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 저만의 철학을 잘 정립해 지켜 나가야겠다고 다짐합니다. 지난 30년 동안 정말 수고 많으셨고 고생하셨습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건강 잘 챙기고 계세요!!”

“00야, 고맙다. 너는 장차 나라의 기둥이 될 거다!”

우리 태양의 후예는 두뇌가 명석하고 선이 굵고 지도력이 뛰어났다. 공군사관학교와 연세대에 복수로 합격했다. 나는 공사(空士)가 좋겠다고 했지만, 그는 행복한 고민을 거듭하다가 F-16 대신 새마을(신촌)호를 탔다. 졸업 후 ‘그랜저’ 회사에 잠시 머물다가, 조종사의 꿈이 무지개처럼 피어오르고 구름처럼 솟아올라, 훌쩍 점보기에 몸을 싣고 제트기류를 탄 모양이다.

“네 정확히 말하면 파일럿이 되려고 미국에 와 있습니다. ㅎㅎ 고등학교 때 꿈을 찾아 돌아돌아왔네요. ㅎㅎ 한국 가면 찾아뵙겠습니다.”

“그래, 그때 보자~ 정신적으로 성숙하면, 늦은 게 늦은 게 아니지.”

서울 남산식물원의 히어리(위, 촬영 최성재)와 히어리의 잎사귀(아래, 출처:국가생물종지식정보시스템)
서울 남산식물원의 히어리(위, 촬영 최성재)와
히어리의 잎사귀(아래, 출처:국가생물종지식정보시스템)

나는 시행착오(trial and error)를 귀중한 자산이라고 생각하고 이를 학생들에게 주지시켰다. 잘 났든 못 났든 지구촌의 으뜸 실존은 자기 자신인데, 사람은 시행착오를 통해 비로소 자기 자신의 길을 찾고 삶의 의미를 깨닫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학생의 진로만큼 지도하기 어려운 것도 없으리라. 때로 한 사람의 인생을 결정할 수도 있으니까. 지도는 하되 책임은 질 수 없다는 데서, 조언(助言)의 짐은 그만큼 더 무겁다.

“여러분, 우리나라는 대학의 서열을 주로 문제 삼지만, 선생님은 학과의 서열이 더 문제라고 봅니다. 대학의 서열은 없는 나라가 없습니다. 어떤 면에서 크게 장려해야 합니다. 서울대 수준 10개, 카이스트(KAIST)와 포스텍(POSTECH) 수준 10개를 더 키워야 합니다. 나아가, 우리나라에서 하버드나 옥스퍼드를 능가하는 대학을 육성해야 합니다.

중등교육만 따지면, 독일이 세계최고라고 할 수 있지만, 2차 대전 후 독일은 대학을 사실상 평준화하면서 영국의 옥스퍼드와 캠브리지, 미국의 하버드와 예일을 능가하던 베를린과 하이델베르크는 이제 세계 50위도 들었다 말았다 합니다. 반면에 프랑스는 일반 대학은 평준화했지만 그랑제콜(Grandes Écoles)은 그대로 두어, 세계 50위 안에 미국이 제일 많고 그 다음에 영국이 많지만, 거기에 에콜 폴리테크니크를 비롯하여 꼭 두세 개는 이름을 올립니다.

인제의대 가면 ‘소’신 지원이고, 서울농대 가면 ‘개’신(무소신) 지원입니까? 약이 밥보다 중요합니까? 그건 소신 지원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의 가치관을, 한국인의 뿌리 깊은 직업귀천 가치관을 받아들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현대판 사농공상(士農工商) 의식을 말입니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 이것, 찾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내 생각이 오리지널 내 생각일 경우가 오히려 드뭅니다. 시대의 흐름은 예의(銳意)주시하되, 거기에 함몰되지는 말기 바랍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들려주던 내 훈화 중 하나이다.

(*이 글 앞부분에서 반은 사실, 반은 허구임. 필자는 등촌고에서 초빙교사로 10년 근무함.) (2017. 12. 27.)

◇ 필자 최성재는?
서울대 영어교육과 졸업
전 영어교사
문화·교육평론가
 

csj@jay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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