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나나 학예연구사, 일제강점기 사진·현존 유물 분석 논문
문화재청 "석재가 난간석으로 판명되면 월대 복원 시 활용"

구리 동구릉에 있는 광화문 월대 난간석 추정 석재. 전나나 학예연구사 제공. /연합
구리 동구릉에 있는 광화문 월대 난간석 추정 석재. 전나나 학예연구사 제공. /연합

조선 고종이 1865년 무렵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정문인 광화문 앞에 넓게 조성한 월대(月臺·기단 형식의 대)의 난간석 일부로 추정되는 석재들이 조선왕릉인 구리 동구릉에 남아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동구릉에 보존된 석물이 난간석으로 밝혀지면 문화재청과 서울시가 광화문 광장 조성과 맞물려 추진하는 광화문 월대 복원에 활용될 것으로 예상된다.

9일 학계에 따르면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전나나 학예연구사는 국립문화재연구소가 펴내는 학술지 ‘문화재’ 최신호에 실은 논문에서 일제강점기 사진 자료와 광화문 앞에 남은 난간석, 동구릉에 있는 석조문화재를 비교·분석해 상관관계를 찾아냈다고 주장했다.

조선왕릉 석조문화재를 연구해 박사학위를 받은 전 연구사가 논문에서 제시한 1920년대 광화문 사진을 보면 월대 위에 기다랗게 설치된 난간석이 확인된다.

전 연구사는 난간석이 월대 양쪽에 배치됐으며, 난간석주(欄干石柱) 20점과 죽석(竹石)·동자석(童子石) 각 19점이 한쪽 난간을 이뤘다고 설명했다. 난간석주는 난간에서 기둥 역할을 하는 돌이며, 죽석은 횡렬로 두는 기다란 석재다. 동자석은 죽석을 받치는 돌이다.

현재 광화문 앞에는 국립민속박물관 인근에서 가져온 난간석주 1점이 있다. 전 연구사는 난간석주에 대해 "근대 사진에 보이는 광화문 월대 석물과 형태가 같아 고종 당시 제작된 난간석 원형으로 여겨진다"고 짚었다.

이어 동구릉에 이와 매우 흡사한 난간석주 18점, 난간석주와 일체를 이루는 유물로 짐작되는 동자석 20점과 용두석(龍頭石) 2점이 있다고 주장했다. 용두석은 용의 머리를 연상시키는 석조물이다.

전 연구사는 "광화문 앞에 있는 석조난간은 높이가 152㎝이고, 지면에 닿은 하단부의 너비는 65㎝이며, 죽석이 들어가는 팔각형 구멍 크기는 가로 22㎝·세로 23㎝"라며 동구릉에 있는 난간석주 크기와 거의 동일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동구릉 난간석주와 1897년 선포된 대한제국 시기의 난간석주를 비교했을 때 드러나는 유사점도 논했다.

전 연구사는 "환구단, 칭경기념비각, 덕수궁 금천교 등 대한제국 시기 난간석주와 동구릉 난간석주는 모두 상단이 세모꼴에 가깝고, 그 아래 사다리꼴 받침이 있다"며 "광화문 월대 난간석주로 보이는 동구릉 석재들은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에 설치된 난간석주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고 평가했다.

입을 벌리고 있는 듯한 한 쌍의 용두석에 대해서도 "세부적인 문양과 형태를 검토했을 때 광화문에서 비롯된 석물임이 확실시된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동구릉 외금천교 부재로 알려진 무지개 형태 홍예석은 일제강점기 자료인 ‘조선고적도보’ 사진을 근거로 경복궁 흥례문과 근정문 사이에 있는 다리인 영제교의 홍예석이라는 견해도 제시했다. 현대에 복원된 영제교는 새 부재로 만들었다.

전 연구사는 석재들의 이전 시기에 대해 "광화문 월대는 1923∼1925년에 전차 선로 개설과 도로 정비 등 이유로 해체됐다"며 "조선총독부 청사가 건립되면서 경복궁 어딘가에 모여 있다가 1940∼1970년대에 옮겨진 것 같다"고 추정했다.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관계자는 "동구릉 석재의 유래는 아직 정확히 파악되지 않았다"며 "광화문 월대에 있는 난간석주와 동구릉 석재의 치수를 실측하고 전문가 의견도 참조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어 "동구릉 석재가 월대 난간석으로 판명되면 복원 시 가져다 쓸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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