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항기 이주한 화교들이 고향음식 해먹다가 탄생한 음식
춘장+양파+단무지+김치 결합...한중일+서구 문화의 총합

인천 ‘짜장면 박물관’(구 공화춘). 인천시가 인수해 2012년 현재의 박물관으로 다시 태어났다. /짜장면 박물관
‘짜장면 박물관’에 전시된 20세기초 인천 개항장 주변 모습. 한-중-일, 서구가 만나는 가운데, 짜장면은 항만노동자 등 서민들의 음식으로 태어났다. /짜장면 박물관

짜장면은 문화 전파·창조의 속성이 응축된 음식이다. 문화에 ‘원조 따지기’가 별 의미 없음을 잘 보여준다. 중국에서 왔으나 중국엔 없던 음식, 중국인들도 우리나라 짜장면을 ‘서울짜장면(漢城炸醬麵)’이라며 따로 취급한다. 50대 이상 한국인들에게 추억의 음식, 21세기 여전히 세대를 초월해 사랑받는다. 물가 동향을 살피는 기준 품목의 하나로서, ‘국민음식’ 칭호가 지나치지 않다. 1960년대 짜장면 가격이 15원, 당시 곰탕 가격이었다니 서민들에겐 고급 음식이었던 셈이다.

짜장면의 첫 등장은 1900년대 초 인천에서였다. 1883년 인천 개항장이 생기고 이듬해 지금의 인천 차이나타운 터에 중국인의 집단 거주지 ‘청국 조계(租界)’가 들어선다. 청일전쟁 무렵 중국인들, 특히 산동성 사람들이 바다 건너 인천으로 몰려들었고 중국요릿집 역시 늘어갔다. 군인들을 따라 이국 땅에 온 사람들, 살기 힘들어 고향을 등진 사람들이 많았다. 이들의 후예가 우리나라 ‘화교’의 주류다.

화교들이 고향음식을 해먹다가, 손수레나 길거리 난전에서 ‘볶음 장을 얹은 중국식 비빔면(짜쟝몐)’을 팔기 시작했을 것이다. 조만간 주변 식당들에서도 팔게 됐으리라. 1908년 산동회관으로 개업해 몇년 뒤 개명한 공화춘(共和春), 대불호텔의 후신인 중화루(中華樓), 3층 목조호텔을 개조한 동흥루(東興樓) 등 대형 음식점 외 가정집이나 상점 한쪽에 식탁 서너개 놓인 음식점들에서 짜쟝몐은 인기 메뉴가 된다. 항만 노동자들이 즐겨 찾으며 퍼져 나갔다는 게 유력한 설이다.

학계·업계에 따르면 ‘한국식 짜장면’은 1950년대 들어 현재 모습을 갖췄다. 영업 수완 뛰어난 화교들이 밀가루·콩 발효물이었던 갈색의 중국 된장 톈몐쟝(甛麵醬)에 서양의 캐러멜을 첨가한다. 검은색 춘쟝(春醬→춘장)은 그렇게 태어났다. 한국인 입맛에 맞게 진화한, 한국에만 있는 다국적 양념이다. 원래 짜장면의 곁반찬은 이 춘장을 찍어먹는 대파였다고 한다. 그 어원을 ‘총쟝(蔥醬, 대파 찍어먹는 장)’의 변음으로 보기도 한다. 비슷한 발음의 한자(春)를 하나 얹은 것이다. 훗날 양파가 대량 재배돼 저렴해지면서 양파+춘장, 이윽고 ‘생 양파+일본식 단무지’의 조합이 된다. ‘인천 문화유산 이야기 여행’(문화재청 발간) 책자는 "인천 개항장에 들어 온 중국 짜쟝몐이 서양 캐러멜을 만난 후 일본 단무지·한국 김치를 곁들이면서 ‘짜장면’으로 다시 태어났다"고 말한다. 소소한 다국적 문화의 총합이다.

인천시는 짜장면의 역사성과 문화를 전승하려는 노력을 지속하고 있다. 인천 중구가 공화춘 건물을 매입, 2012년 국내 최초 ‘짜장면 박물관’을 열었다. 화교의 역사까지 훑어볼 수 있는 문화공간이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외국인 무역규제 강화는 화교들의 업종을 대거 전환시켰다. 대부분 음식업에 종사하게 된다. 자본도 기술도 없던 시절, 세계적 네트워크의 화교 자본을 경계했던 터라 무조건 ‘배외주의’로 비난하기 어렵다. 동남아 국가들의 경우를 볼 때 이 판단은 주효했다. 한중수교 30년이 돼가는 현재, 이젠 중국 자본에 의한 잠식을 걱정해야 할 형편이다. 구 화교 자본 이상으로 위협적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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