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연재를 시작하며

초기엔 숨어서 이승만 연구...13년 만에야 '이승만연구원' 간판 달아
'독재자'부터 '건국의 아버지'까지...주의·주장보다 옳고 그름 가려야

이승만연구원에 마련된 전시 공간.
류석춘
류석춘

대한민국 건국 대통령 이승만에 관한 문헌이 요즘에는 넘쳐난다. 그러나 필자가 연세대학교 부설 ‘이승만연구원’ 초대 원장으로 발령받은 2010년 11월로만 돌아가도 사정은 완전히 달랐다. 당시는 극히 소수의 전문 연구자들만이 학술서적이나 학술논문의 형식으로 이승만에 관한 연구를 ‘숨어서’ 진행하고 있었다. ‘숨어서’ 연구를 했다는 말의 의미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바로 ‘이승만연구원’의 전신인 연세대 국제학대학원 부설 ‘현대한국학연구소’가 출범하는 과정이다. 이 이야기는 대통령 문서를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시스템이 전혀 없던 1960년 4.19 당시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야 직후 이승만은 경무대에 보관 중이던 각종 문서를 자신이 거처하는 ‘이화장’으로 옮기고 기분전환을 위해 잠시 하와이로 여행을 떠났다. 그러나 그는 결국 돌아오지 못하고 그곳에서 1965년 임종을 맞았다. 그 사이, 집권한 허정 그리고 장면 정부는 이화장에서 통치에 필요한 문서들을 함부로 가져가기도 했다. 1961년 11월 문중의 뜻에 따라 이승만의 양자로 입적된 이인수는 생면부지의 부친과 상봉하기 위해 잠시 하와이를 방문하고 돌아와, 6.25 그리고 4.19 때문에 흩어진 ‘이승만 문서’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진해에 있던 문서보관서까지 뒤졌다. 이화장에 모은 문서에 먼지가 쌓이며 세월이 흘렀다.

30여 년이 지난 1993년 말 이인수 박사는 당시 한림대 역사학 교수 유영익을 이화장으로 초청해 정리하지 못한 채 보관 중인 ‘이승만 문서’를 보여줬다. 문서의 가치를 알아본 유영익은 이인수의 문서 정리 제안을 즉석에서 수락했다. 문서 정리에 필요한 자금은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다음 단계는 ‘이승만 문서’를 전문적으로 연구할 대학의 연구소를 확보하는 일이었다. 연세대가 긍정적 반응을 보였다. ‘기독교 정신’이라는 가치가 이승만과 연세대를 이어 주었다. 당시 총장 송자가 나서서 연구소는 물론 연구를 전담할 석좌교수 자리도 만들겠다 약속했다. 연구에 필요한 공간은 부암동 저택을 기증한 최송옥 여사의 도움을 받았다.

마침내 ‘이승만연구’에 필요한 사료, 자금, 공간이 모두 연세대에 모였다. 후임 총장 김병수는 1997년 11월 ‘이승만연구’를 위한 연구소의 문을 공식적으로 열었다. 창립 소장은 물론 유영익 석좌교수였다. 대한민국 건국 대통령 이승만에 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순간이다. 그러나 연구소의 이름은 ‘이승만연구’를 한다는 사실을 전혀 드러내지 않았다. ‘독재자’로만 인식되어 온 이승만을 연세대가 연구소까지 설치하여 운영한다는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면 역풍을 맞아 좌초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아무런 색깔이 없는 ‘현대한국학연구소’라는 간판이 붙여진 까닭이다.

이로부터 13년 동안 정체성을 드러내지 못하던 ‘현대한국학연구소’는 2010년 필자를 책임자로 임명한 김한중 총장의 결단으로 마침내 ‘이승만연구원’이라는 겉과 속이 일치하는 이름을 갖게 됐다. 위상도 높아졌다. 국제학대학원 부설 연구소에서 연세대학교 부설 연구원으로 격상됐다. 2003년 연세대에 설치된 또 다른 전직 대통령 이름을 딴 도서관 역시 그러한 변화를 촉진했다. ‘김대중은 되고 이승만은 안 되냐’는 여론이 비등했었다.

정체성에 맞는 간판을 달며 초대 원장이 된 필자는 연구원의 활동 영역을 기존의 ‘숨어서’ 하는 순수한 학술적 연구에서부터 ‘내놓고’ 대중의 관심을 끄는 전투로까지 확대했다. 반응도 좋았다. 그 결과 대내외적 활동이 폭증했다. 학술적 활동의 대표적 성과는 31년에 걸쳐 당신이 직접 쓴 『이승만 일기』를 2015년 ‘대한민국역사박물관’과 공동으로 출판한 일이다. 대중의 관심을 끄는 전투는 부암동 연구원 공간을 시민사회 활동의 진지로 활용하면서 활발해졌다. 민족문제연구소가 2012년 ‘100년 전쟁’이란 황당한 시리즈물로 유튜브에 올린 영상 ‘두 얼굴의 이승만’을 반박하는 영상 ‘생명의 길’이 이승만연구원을 중심으로 2013년 제작되어 유튜브에 올랐다. 또한 ‘백년동안’이 출판한 대중 교양서적 『이승만 (고정관념) 깨기』 (2015) 및 『시간을 달리는 남자 (이승만)』 (2016) 의 기획과 집필도 연구원과 시민단체의 협력으로 이뤄졌다. 대중의 관심을 끌기 위해 ‘이승만 문서 특별전’도 2013년 마련했다.

그러나 2015년 8월 초대 원장의 임기가 끝나면서 연구원은 다시 순수한 학술연구로 활동의 폭을 스스로 좁혔다. 그러는 동안 세상도 많이 바뀌었다. 국민들은 좌파와 우파를 오가며 대통령을 선택했고, 그에 따라 대한민국의 미래는 물론 과거도 널뛰었다. 이승만에 대한 평가가 가장 극단적 사례다. 부정선거로 권력을 유지하려다 쫓겨난 ‘독재자’라는 인식에서부터, 자유민주주의를 이 땅에 가져와 번영하는 대한민국의 기초를 닦은 ‘건국의 아버지’라는 인식까지 그 격차는 아직도 어마무시하게 넓고 깊다.

이 격차의 한 가운데에 ‘이승만연구원’이 존재한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사료에 기초한 객관적이고 실증적인 연구 없이 저 끝없는 간격을 메울 방법이 어찌 있겠는가? 주의와 주장도 필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일은 주의와 주장이 현실은 물론 역사적 사실에 맞는지를 따져 옳고 그름을 가리는 일이다. 경우에 따라선 전투도 피할 수 없다.

이 연재물은 이승만이라는 과거의 인물이 오늘날은 물론 미래의 대한민국에 남겨 준 유산을 최대한 사실로 접근하는 노력이다. 그리하여 독자들은 이 연재물을 읽고 오늘날 존재하는 주의와 주장의 끝없는 간격을 스스로 좁히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전투도 각오해야 한다. 이를 위해선 시간을 달린 지도자와 함께 독자도 시간을 달려야 한다.

‘이승만연구원’ 현판. 2010년이 되어서야 이름을 갖게 되었다.
‘이승만연구원’ 현판. 2010년이 되어서야 이름을 갖게 되었다.
1997년부터 보관해 오던 ‘이승만문서’를 보다 안전하게 보관, 관리하기 위하여 2012년 학술정보원으로 옮겼다.
부암동에 있는 이승만연구원 가는 길.
부암동에 있는 이승만연구원 가는 길.
최송옥 여사의 기증으로 이승만 연구에 필요한 공간을 만들게 되었다.
이승만 연구원 마당 전경.
이승만 연구원 마당 전경.
이승만연구원 회의실에서 자료를 정리하는 모습.
이승만연구원 회의실에서 자료를 정리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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