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3년 카이로 회담의 장제스, F.루스벨트, W.처칠, 장제스 부인 송메이링

1945년 8월 15일, ‘도둑 같이 온 해방’이었다. 준비없이 얼떨결에 맞이했다는 탄식의 의미로 쓰이곤 한다. 해방정국의 혼란, 천신만고의 건국과 6·25전쟁을 치르며 대한민국은 자유세계의 일원이자 냉전의 최전선으로 자리잡았다. 일제가 패망했기에 가능한 일이었고, 상황의 최종 돌파자는 미국이었다. 20세기 역사의 최고 드라마인 대한민국의 탄생과 유지·발전의 배후에 유엔, 그리고 미국으로 대표되는 자유세계가 있었다. 이 감동 스토리의 서막은 일본의 대미(對美) 도발로 시작된다.

미·일우호를 깨고 몰락한 일본

패망을 향한 일제의 결정적 행보는 1941년 12월 7일 진주만(Pearl Harbor)공습이었다. 이로써 2차대전 연장선인 태평양전쟁이 촉발된다. 하와이 아오후 섬, 미 태평양 함대의 모항 진주만에 일본 전투기들이 집중 폭격을 퍼부었다. 선전포고 없는 기습에 미군은 큰 피해를 입었고 충격에 빠졌다. 1930년대 들어 일제의 중국침략 이후 국민당 정권을 지원하는 미국과 불편해지긴 했으나, 미·일 사이엔 각별한 우호의 역사가 있다.

일본은 ‘쿠로부네(黑船)’로 상징되는 미국의 우월한 근대적 장비 앞에 무릎을 꿇고 개항했지만, 그 일련의 역사에 트라우마도 원한도 없다. 오늘날 미국의 수도 워싱턴D.C. 포토맥 강변의 벚나무들은 일본인들의 감사표시다. 1912년 일본 측이 제공한 벚나무숲은 꽃피어 장관을 이룬다. 해마다 전세계 관광객으로 북적인다.

20세기초 서구열강의 공통 관심사는 ‘러시아 남하’의 저지였다. 그 대열에 동참하며 일본은 영국·미국의 지원으로 승승장구한다. 근대일본의 성공은 당시 시대상황과 국제정치 역학의 이용 없이 상상하기 힘들다. 외교적 판단이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는 전형적인 사례에 속한다. 대한민국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일본은 아시아 국가로서 유일하게 제국주의 열강에 진입해 성공가도를 달리는 듯했다. 그러나 천연자원·저임금 노동력을 계속 조달하고 시장을 확대해야만 지속 가능한 자본주의 2.0 시대, 한계에 부딪혔다. 돌파구가 필요했다. 해양성 기후 태생에 체격도 왜소한 편인 일본인들에게 기골이 장대한 러시아인들과의 혹한 속 싸움은 부담스러웠다. 서구를 대신한 힘든 싸움보다, 중국의 만주 및 내륙 진출이 상대적으로 손쉽고 끌리는 선택이었다.

만주에 괴뢰국가를 세우고 내륙으로 진출하던 일제는 끝내 자멸로 가는 무리수를 둔다. 그게 진주만 공습이었다. 수십년 성공적 행보에 따른 ‘국뽕’이 기폭제가 됐다. 처음부터 미국과의 전면전을 기획했던 것은 아니다. 일단 강력하게 도발에 기선을 제압한 다음 협상을 이끌어내려는 구상이었으나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미국을 만만하게 본 것은 아니지만 그 근본 저력에 대해 무지했던 셈이다. 미국의 유럽 전선 참전으로 나치의 몰락이 앞당겨진다. 나아가 다수의 유럽인 망명자를 받아들이며 미국은 홀로코스트의 해방자로 자리매김했고 대영제국을 능가하는 강대국으로 급부상했다.

미·일 충돌을 예견한 이승만

미·일의 충돌을 예견한 이는 드물었다. 훗날 대한민국 건국대통령이 된 이승만의 식견과 통찰력은 그래서 독보적이다. 국제관계의 격변을 독립의 최고 기회로 인식하고 외교 노력에 집중해왔다. 일본이 국제연맹을 탈퇴하고 중국대륙 침략을 본격화할 때 이승만은 때가 오고 있음을 느꼈다. 진주만공습 6개월 전 <일본 내막기(Japan Inside Out)>를 출간해 일제의 야욕과 위험성을 알리며 그 피압박 민족의 억울함을 호소한 것은 놀라운 한 수였다. 책 출간 후 진주만공습으로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은 식민지 망명객에서 일약 세계적 유명인사가 된다.

미국 생활 약 40년간 이승만은 무국적자를 고수했다. 일본제국 치하 조선 출신이었으나 일본 국민의 모든 편의를 거부한 것이다. 미·일 밀월시대인 1920년대까지는 항일 무력투쟁을 말리는 입장이었다. 실효성보다 희생이 크다고 봤기 때문이다. 미국인으로 귀화하지도 않았다. 이승만은 국제적인 외교활동을 하면서 일본 당국이 발행하는 여권 대신, 친분 있는 미국 명망가들의 추천서를 들고 다녔다.

진주만공습 6개월전 출간된 이승만의 영문 저서 <일본 내막기>

 

"전쟁! 하와이 오아후 섬 美군항(Pearl Harbor), 일본 전투기들에 피폭" <호놀룰루 스타-뷸레틴> 호외

대한민국의 후원자 유엔, 그 토대 <대서양헌장(The Atlantic Charter)>

2차대전이 한창인 1941년 8월14일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과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 사이에 <대서양헌장>이 교환된다. 이 문서는 전후 세계질서의 기본 골격을 담고 있다. 지난 수십년 대한민국을 비롯한 자유세계의 모든 나라들이 누려온 혜택이다. 8개 항목 중 특히 "모든 민족은 자결권을 가진다."

"무역장벽을 낮춘다" "공해(公海)와 대양을 자유롭게 항해할 수 있다" 3개조는 최근 들어 의미가 새롭다. 중국의 남지나해 영해화 시도로 인해 ‘항행(航行)의 자유’가 위축되고 있다. 통상으로 먹고사는 대한민국에게 치명적인 사태다. 경고의 의미로 몇 개월 전 영국·미국·네덜란드의 대형 항모들이 이 해역에서 퍼레이드를 펼치고 함대를 주둔시키면서 긴장감은 높아지고 있다. 중국의 최근 행보에 약 80년전 일제의 모습이 겹친다.

대서양헌장.
대서양헌장.

英·中·美 5일간 ‘신경전’ 끝에 ‘한국 독립’ 첫 명시

2차대전 후반에 접어들면서 연합국 정상들은 전후 질서를 논의하는 회동을 몇 차례 가진다. 그 중 처음으로 대한민국 독립이 확인된 게 1943년 처칠·루즈벨트·쟝졔스가 카이로에 모였을 때였다. 5일간의 신경전 끝에 12월 1일 ‘카이로 선언’이 나왔다. 동남아 식민지배의 지속을 원하는 영국, 만주 수복을 주장해 영토확장 욕심을 의심받은 중화민국이 대립했으나 미국의 조정·설득으로 수습된다.

카이로 선언의 의의는 대한민국 탄생 가능성의 확인만이 아니다. ‘대서양헌장’에 이어 미국이 구상하는 전후 세계질서가 천명된 점 또한 중요하다. 식민지(Colony)를 국민국가(Nation State)로 독립시키고 아우른 게 국제연합(United Nations) 즉 유엔이다. 2차대전 직후 국제질서의 혼란과 재편 속에 우리는 건국의 기회를 잡았다. 시대상황을 주도적·창조적으로 활용해 운명을 개척한 것이다. 수천년 한반도 역사에 자유민주공화국이 출현할 만한 배경도 자원도 없었다. 그래서 거저 주어진 듯 보이지만 막후의 드라마를 알면 공짜가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

2013년 ‘카이로 선언’ 70주년 기념비.
2013년 ‘카이로 선언’ 70주년 기념비.

한민족과 쿠르드족, 같은 염원 다른 운명

‘해방’과 ‘독립’은 다르다. 일제 패망으로 한반도는 해방됐으나 그 지위는 ‘일제에서 분리된 지역’에 불과했다. 심지어 일제의 일원으로 연합국에 대항한 존재들로 인식되기도 했다. 국제질서를 주도하는 강대국들에게 한반도 주민들은 낯선 존재였다. 자유민주국가로 건국할 것인지 의지와 자질 또한 미지수였다. 국제관계의 격변이 펼쳐지는 상황에서 무엇을 어떻게 호소하고 거래하느냐가 관건이다. 독립 즉 대한민국 건국은 결정적 순간에 힘을 발휘한 오랜 외교노력의 공이 크다. 국제정치 역학과 시대상에 대한 정확한 독해와 기민한 판단, 강대국들과의 소통 없이는 다른 모든 노력이 허무해지기 쉽다.

영웅적 무장투쟁을 벌인 모든 피압박 약소민족이 독립을 쟁취한 것은 아니다. 무장투쟁이 독립국가 수립에 절대적인 부분이라면 쿠르드족의 현대사는 설명이 안 된다. 무장투쟁은 자신의 정체성과 독립 의지를 알리는 가장 직접적인 길이긴 하지만, 의의에 비해 실효가 적은 게 현실이다. 배신당하는 경우도 많다.

쿠르드족 여전사들. 문화적 정체성이 강하고 독립국가 건설의 열망도 뜨겁다. 오랜 세월 남녀노소 기꺼이 무력투쟁에 나섰지만 독립의 꿈은 요원해 보인다.
쿠르드족 여전사들. 문화적 정체성이 강하고 독립국가 건설의 열망도 뜨겁다. 오랜 세월 남녀노소 기꺼이 무력투쟁에 나섰지만 독립의 꿈은 요원해 보인다.

쿠르드족은 터키·이란·이라크·시리아 등지에 흩어져 사는 이란계 산악 민족이다. 페르시아어 계열의 쿠르드어를 사용하며 전체 인구 3000(혹은 3500)만 가운데 절반 정도가 터키에 거주한다(터키 인구의 20%). 문화 정체성이 강하며 독립국가를 열망하지만 매번 국제역학과 강대국들 이해관계 속에서 이용만 당했다.

남녀노소 민병대로 나설 만큼 용맹스러우나 여전히 독립국가의 꿈은 요원해 보인다. 국제질서의 주도자들과 소통하며 자신들의 전략적 가치를 적극 설명하고 상황을 활용하는 지도적 인물이 보이지 않는다. 1차대전 당시 독립 지원을 약속한 영국 측에 가담해 싸웠으나 꿈을 이루지 못했다. 몇 년 전엔 미국 요청에 호응해 IS와 싸웠지만 시리아 미군철수로 위기에 처했다. 쿠르드족의 비극은 대한민국의 천운을 일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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