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명신
임명신

근대적 업종에 많건 적건 일본말 잔재가 있다. 그 중 언론계에서 상용되는 ‘야마’ ‘우라까이’ 등은 유난히 모순적으로 느껴진다. 원래 근대어(국어=표준어)가 창출되던 시대의 한 중심에 근대적 활자매체(언론)가 있었다. ‘언론=근대의 꽃’이란 표현이 한국의 경우만큼 적절한 경우도 드물다. 짧은 세월 속에 집중적으로 그 역할을 수행했다. 언어는 보수적이면서 살아 움직이는 ‘생물’이다. 언중(言衆)과 독서시장의 논리가 작용한다. 순식간에 변하는 예는 많지 않다. 서울을 한청(Hancheng, 漢城)이라 부르던 중국이 한국정부 요청으로 셔우얼(首爾)로, 구 소련 출신 ‘그루지야’가 국가의 방향성과 연결해 영어 발음 ‘조지아’로 정식 개명한 것 정도 아닐까 싶다.

인종적·언어적 단일성이 높은 나라의 경우, 일단 국어가 성립하면 도저히 꼭 안 쓸 수 없는 외국어는 ‘외래어’로서 국어의 범주에 넣는다. 아울러 자기말과 섞이기 좋도록 발음이 약간 혹은 크게 왜곡된다. Computer를 강세 무시한 채 ‘컴퓨터’로 읽고 쓰는 것 또한 그런 이치다. 문제는 은어·비어 형태로 남아 있는 외국어, 특히 우리말 속 일본어다. 우리말의 ‘오염’이라고 성토하자는 게 아니라, 같이 생각해봤으면 한다. 우리는 근대국가로서 정체성 확립기에 필연적으로 나오는 ‘국어사랑 나라사랑’의 시대를 지났다. 언어의 ‘순정(純正)함’보다는 ‘풍부함’을 지향해야 할 단계에 있다. 그렇다면, 영어·불어 등 외국어를 섞어 쓰면서 일본어는 왜 안 되나. 이런 문제에 감정적인 이유로 국가나 언어를 차별하는 것도 오늘날 대한민국의 위상이나 품격에 걸맞지 않다.

일본어 ‘야마’=산(山)은 가장 높은 곳 즉 ‘절정’으로 의미가 확장됐고, 한국 언론계에선 기사의 ‘요점’ ‘골자’라는 뜻으로 쓴다. 안 쓰려면 대안이 있어야 하는데, 포인트·절정·클라이맥스 등 어느 것도 ‘야마’의 적확함 효율성을 대체하기 어려워 보인다. 남의 기사를 적당히 손질해 탈바꿈시킨다는 ‘우라까이’란 ‘우라가에시(뒤집개질)’의 와전인 것 같으니 일본어도 아니다. 이 역시 딱 떨어지는 대안이 발견되지 않는다. 이쯤 되면 외래어로 인정해야 할까?

수천년 중화제국과 근대 일본제국 사이에서 살아남은 우리나라, 심지어 독자적인 말과 글(문자)을 보유하며 고급 언어생활을 하게 된 기적 같은 역사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고전중국어(한문)는 2000년 이전에 확립됐다. 20세기 전반 현대중국어를 형성시킬 수 있었던 배경엔 <삼국지연의> <수호전> <홍루몽> 등 수 백년 구어(백화)체 기록의 역사가 있다. 전 세계 수천 개 언어 가운데 문학·학술을 할 수 있는 수준으로 발전한 언어는 우리말을 포함해 40개 미만이다. 19세기 후반까지 한반도의 공통 문어는 고전중국어, 말은 두 종류였다. 사대부 계층 이상이 쓰던 한문투의 관화(官話)와 그 외 사람들의 일상어. 양자가 어우러져 구한말 국한문혼용체라는 과도적 언문일치를 거쳤다.

그런데 국한문혼용체의 허술함·어색함이 1918년 이광수 <무정>의 시대에 이르면 현대한국어와 큰 위화감 없는 상태로 급진화한다. 그 배경에 근대 일본어가 있다. 우리말은 먼저 수십년간 고전 끝에 이룬 일본어의 성과(한자어)를 고스란히 가져다 쓰며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부끄러운 일도 감출 일도 아니다. 짧은 기간 내 전폭적으로 이뤄졌을 뿐, 실은 근대화한 언어들이 다 겪은 일이다. 이 부분의 역사에 관심 있는 분들을 자유일보 ‘근대어 산책’에 초대하고 싶다. 근대 들어 쓰게 된 우리말 어휘들을 둘러보는 코너다. ‘야마’ ‘우라까이’를 우리말(외래어)로 받아들일 것인가와 관련해 영감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

저작권자 © 자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