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 예상대로···'권력'이 된 정대협, 위안부를 왜곡
김일성 예상대로···'권력'이 된 정대협, 위안부를 왜곡
  • 박두진
  • 승인 2018.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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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김일성을 방문한 일본의 가네마루 신 의원.
1990년 김일성을 방문한 일본의 가네마루 신 의원. 맨왼쪽이 가네마루 의원, 가운데가 김일성이다.
영화 '침묵-일어나는 위안부'에서 폭로된 '정대협'(下)

배봉기 할머니 3주기 때 '피해자의 모임' 발족

1990년 일본 가네마루 신 의원이 방북 때 들고 간 ‘위안부 문제’는 김일성에겐 놓칠 수 없는 큰 ‘선물’이었다. 김일성은 위안부 문제를 ①대일 배상금 요구 확대와 ②한일 갈등 ③남남 갈등을 촉발시킬 수 있는 ‘전략적인 무기’로 판단했다.

이후의 위안부 문제에 대한 한일 간의 양상은 김일성이 바라던 대로 흘러가는 모양새가 되었다.

박수남 감독의 다큐 영화 '침묵'의 한 장면.
박수남 감독의 다큐 영화 '침묵'의 한 장면.
위안부 문제의 시발점이 된 오키나와의 배봉기 할머니의 생전 모습.
위안부 문제의 시발점이 된 오키나와의 배봉기 할머니의 생전 모습.

한국의 '정신대문제 대책협의회'(정대협)와 '태평양전쟁 희생자 유족회'가 일본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보상요구 재판’ 과정에서 드디어 첫 번째 갈등이 노출된다.

그간 전위대 역할로만 그쳤던 위안부 할머니들 40명이 '정대협'의 정치적 이권화 움직임에 반기를 들고 “우리가 주인공이다”라며 독립선언을 한다.

‘정대협’과 결별한 할머니들 중 18명이 합심해 1993년 11월 25일 ‘현 생존 강제 군대위안부 피해자 대책협의회’(피해자의 모임)를 결성하며 박수남 씨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지원 요청을 접한 박수남 씨는 이렇게 당시를 술회했다.

배봉기 할머니 3주기를 추모했을 때 한국에 계신 위안부 할머니 18명이 이른바 반란을 일으키고 지원단체(정대협)로 부터 이탈했습니다. 그 때문에 피해자들은 ‘정대협’과 연대하고 있던 ‘일본사회당 전후보상위원회’의 지원이 끊기게 되고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졌습니다.

내가 3번째 영화의 제작을 단념하게 된 것은 할머니들이 나에게 도움을 요청해 왔기 때문입니다. 제멋대로 조총련이 빼앗아간 배봉기 할머니의 유골과 생존한 할머니들의 얼굴이 떠올라 요청을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박수남씨는 자신이 맨 처음 위안부 문제를 제기한 책임감과 함께 이 문제를 인권·인도적 운동으로 발전시키겠다는 의무감으로 할머니들의 싸움을 적극적으로 돕게 된다.

무라야마 전 일본총리가 한국 방문해서 위안부 할머니의 영정을 만지는 장면. 무라야마의 담화에 이은 '아시아 평화 국민기금'의 출범은 본격적인 남남 갈등의 씨앗이 된다.
무라야마 전 일본총리가 한국 방문해서 위안부 할머니의 영정을 만지는 장면. 무라야마의 담화에 이은 '아시아 평화 국민기금'의 출범은 본격적인 남남 갈등의 씨앗이 된다.

그 후, ‘피해자 모임’은 1994년 무라야마 정권이 발표한 ‘민간기금에 의한 위로금=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 국민기금 구상’에 대해 반대의견을 내고 있었지만 할머니들 중 일본 측 회유에 넘어간 7명이 이 ‘국민 기금’을 받아들임으로써 ‘정대협’의 목소리가 커지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때부터 ‘정대협’의 박수남 씨에 대한 방해공작 및 명예훼손적 공격과 인권침해 행위가 노골화된다.

‘국민기금’을 받은 7명은 '정대협'으로 부터 “스스로 공창이 됐다”는 모욕적인 언사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기금 형태로 받아놓은 돈도 제대로 할당받지 못했다. 게다가 이들은 ‘정대협’의 선전에 의해 멸시를 받는 대상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위로금 수취’와 ‘국가 배상-사죄’를 별개의 문제로 단순하게 생각했던 할머니들의 큰 실책이었다.

'정대협'을 비판할 수 없는 사회분위기 조성

이 후 ‘정대협’ 조직이 비대해지면서 ‘정대협’을 비판하는 것은 마치 ‘위안부문제 해결’ 자체를 비판하는 이적행위인 것처럼 매도되는 사회분위기로 변해갔다. 이런 흐름은 한국서도 일본서서 마찬가지였다.

탄력을 받은 ‘정대협’은 스스로 ‘권력 단체’와 ‘이권 집단’이 되고, 위안부문제 해결 운동을 정치운동화 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 운동을 독점해 나갔다. 이 시기부터 ‘위안부 문제’는 인권·인도주의 운동에 의한 해결이 아닌 한-일 국가 간 분쟁의 양상으로 급격히 바뀐다.

이런 분위기를 타고 위안부 위안부문제 해결운동의 ‘원조’라고도 말할 수 있는 박수남 씨는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적대시’된다. 이를 놓칠세라 ‘정대협’의 박수남 씨에 대한 공격은 가짜 정보를 뒤섞어 모략을 하기에 이른다.

다음의 연합 통신 보도에서 당시의 상황을 옅볼 수 있다.

연합통신의 1997년 9월 7일자 일본어 뉴스는 “일본 여성기금 재일동포 박 모씨 또한 잠입”이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지난 1월 우리나라의 일본군 위안부 출신 할머니 7명이 아시아 여성기금의 ‘위로금’을 받는데 주도적 역할을 한 재일동포 박 모씨(여)가 최근 입국, 다른 위안부 피해할머니들을 접촉해 위문금을 받도록 하는 설득 공작을 벌여 온 것이 6일 밝혀졌다.

‘정신대문제 대책협의회’(공동대표 윤정옥) 관계자는... (중략)... “박 씨는 위안부 할머니를 찾아다니며 여성기금의 위로금을 받도록 설득 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중략)...

박 씨는 최근 우리나라(한국) 정부에 의해 입국금지 조치가 내려진 우스누기 케이코(臼杵敬子) 씨와 함께 지난 1월 위안부 피해할머니 7명이 ‘국민 기금’을 받게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지금까지도 서너 번 국내에 입국해 피해자할머니들을 상대로 위로금 수령을 위해 끈질기게 설득하는 작업을 벌이고 있다.

...(중략)...

‘정신대문제 대책협의회’는 박 씨에 대해 입국금지 조치를 내릴 것을 당국에 요청하는 한편, 여성기금 측에 강하게 항의했다.

그러나 이 보도는 ‘정대협’ 측의 ‘사실과 전혀 다른 날조’를 통째로 삼킨 완전한 ‘오보’였다.

박수남 씨의 항의를 받은 연합통신은 2개월 후, 1997년 11월 23일자 일본어 뉴스에서 “재일 위안부 유골 고향으로 돌아오다”라는 제목으로 배봉기 할머니 유골 봉환(奉還)기사와 함께 박수남 씨의 의견을 함께 실었는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일본군위안부 출신임을 지난 73년 처음으로 공개하여 위안부의 역사적 존재를 알린 재일동포 배봉기(裵奉奇) 할머니(91년 사망)의 유골이 송환 되고 최근에 고향에 묻히게 된 것이 23일 확인됐다.

유골 송환을 추진 해온 박수남 씨(62세, 여, 재일동포)에 따르면 배 씨는 지난 91년 10월 14일 오키나와에서 사망하여 6년이 지난 11월 17일 꿈에 그리던 고향 충남 아산군 신창리 마을의 묘지에 박 씨와 친척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묻혔다.

해외에 있던 일본군 위안부의 유골이 국내에 송환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중략)...

또, 이와 함께 박 씨는 “내가 한국에서 위안부 할머니 7명이 아시아 여성기금의 위로금을 받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국내 일부 여론의 보도는 사실이 아니다”라며 “나는 여성기금과는 정반대의 입장에 있으며 위안부 할머니들이 일본정부로부터 배상을 받을 수 있도록 돕고 있다”고 말했다.

박 씨는 또 “여성기금과 관련해 한국정부로부터 입국금지 조치를 당한 사실은 없다”고 덧붙였다.

이렇게 ‘정대협’에 의한 압박과 방해 속에 ‘피해자 모임’은 1998년에 해산 위기에 봉착했다. 이후 ‘정대협’에 의해 휘둘린 ‘위안부문제 해결운동’은 더욱 정치색이 강해졌다. 이 ‘정대협 운동’이 어떤 과정으로 정치적 색채를 띠게 되었고 인권·인도주의 운동에서 멀어져 갔는지를 정확히 아는 사람은 한국에도 일본에도 드물다.

‘정대협’에 의해 왜곡된 ‘위안부문제 해결운동’이 정치운동이 아닌 ‘인권·인도주의 운동’으로 정상적인 궤도에 올라가지 않는 한, 이 문제의 근본적 해결은 아직 요원하다. <편집 상 中-下편을 下편 하나로 묶었습니다>

 

djp@jay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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