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 업은 北 미소작전··· '재일동포 북송'을 기억하라
'평창' 업은 北 미소작전··· '재일동포 북송'을 기억하라
  • 더 자유일보
  • 승인 2018.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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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걸그룹으로 불리는 '모란봉 악단'.
북한의 걸그룹으로 불리는 '모란봉 악단'.
시마다 요이치(島田洋一、후쿠이현립대학교수)

【요점】

・재일조선인의 北으로의 ‘귀국’(재일동포 북송)은 위계(僞計)에 의한 ‘유괴’에 가깝다.

・‘귀국 운동’에는 일본의 좌익학자와 저널리스트도 상당한 역할을 했다.

・적극적인 유화정책을 보이는 文정권은 급속히 北에 포위될 것 같다.

 

북한이 평창올림픽 참가를 표명하고 미녀응원단과 관현악단을 보내려고 하고 있다. 미니스커트와 하이힐의 여성 선전밴드 '모란봉악단' 파견도 거론되고 있다. 노골적인 이미지 전략, 싸구려 뇌쇄(惱殺)공작이다.

한편 일본 이시카와 현 가나자와(金沢) 시 해안에 표착한 목조선에서 새로 북한 남성 시체 7구가 발견되었다고 지난 16일 각 신문이 보도했다. 북한당국에 따르면 겨울에 위험한 동해에서 밀어(密漁, 불법 고기잡이)를 명령받은 사람들일 것이다. 사망자가 잇따라도 신경도 쓰지 않는 것이 북한정권의 본질이다.

미녀들을 앞세운 선전공작의 얼굴과 문자 그대로 '죽음의 출선(出船)'을 강요당하고 있는 강제수용소국가의 현주소다. 이 갭(gap)에 의식적으로 눈을 감은 것이 얼마나 거대한 비극을 낳았는가!

1959년에 시작된 재일조선인 ‘귀국사업’을 예로 들어 본다.

일본 형법 226조는, ‘소재국(所在國) 밖으로 이송할 목적으로 사람을 약취(略取)하여 또는 유괴(誘拐)한자는 2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요코다(横田) 메구미씨 등의 납치(拉致)는 전형적인 ‘약취(略取’」다. 한편 재일조선인의 북한으로의 ‘귀국’은 일단 자유의사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약취(略取)’는 아니지만 위계(偽計=속임수)에 의한 ‘유괴(誘拐)’에는 아주 가깝다고 말할 수 있겠다.

일본을 출항하는 귀환선(北送船). 출처=일본정부 사진 공보 1960년 1월 15일자
일본을 출항하는 귀환선(北送船). 출처=일본정부 사진 공보 1960년 1월 15일호

北을 ‘지상낙원’이라고 선전한 조총련의 강압적인 권유는 바로 ‘위계(偽計)’였다. ‘귀국운동’에는 일본의 좌익학자와 저널리스트들도 상당한 역할을 했다. 그 중에서도 일본공산당원으로서 운동체의 중심인물이기도 했던 테라오 고로(寺尾五郎, 1921-1999)가 1959년에 발간한 북조선견문기 《38도선의 北》의 영향력이 컸다고 한다. 이 책에 대해서는 나중에 菊池嘉晃 씨가 중요한 지적을 했다《北朝鮮帰国事業》(中公新書).

예찬본(禮讚本) 한권으로 역은 이 책이지만 결코 일률적인 가락으로 된 기술이 아니다. ‘소비생활의 이른바 문화성(文化性) 등은 아주 제로이다.’, ‘확실히 조선의 생활은 낮으며 경제는 뒤떨어져 있고 의리에도 모던사회라고는 할 수 없다.’는 등 좋지 않은 면을 지적한 다음에 그런 ‘낮고 뒤떨어졌다는 조선이 급격하게 변해 왔다.…… 대단한 기세로 질주를 시작하고 있다.’는 등으로 희망을 불러 일으키게 계속 쓰는 것이다. 그 때문에 ‘어차피 고생할 것이라면 北에서’라고 하는 기분을 잘 호소했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재일조선인들이 단순히 ‘이상국가 창조에 참가를’이라는 속임수에 걸려들었기 때문이 아니다. 먼저 약 60만명이었던 재일조선인 가운데 80% 이상은 일본에 머물러 있다. 북한행을 선택한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복합적 사정이 있었다고 한다.

우선 귀국사업 개시 당초 재일조선인의 40% 전후가 생활보호 수급자, 즉 ‘무직’이었다. 일본에 있었어도 취직 전망이 없었던 것이 북송으로 떠밀린 큰 이유였을 것이다. (더욱이 수년 후에는 북한 당국이 일반인보다 과학자·기술자 등을 우선 귀국시키도록 조총련에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17세에 北으로 건너가서 그 후 탈출에 성공한 정기해(鄭箕海)는 부모의 간청에 못이겨 마지못해서 북송선을 탔지만 편물학교와 파친코사업 등으로 일단 생계를 이었던 맏형가족은 일본에 남았다고 기록했다. (鄭箕海 《귀국선》文春文庫)

김일성은 직업과 의식주, 무상의료, 기타 사회보장 및 자녀 교육기회를 되풀이해서 보장한다고 했다. 과장은 있었어도 설마 새빨간 거짓말이야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의 안이함을 나무랄 수는 없다.

제1-3대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
제1-3대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

더구나 재일조선인의 대부분이 한반도 남쪽 출신이었다. 北은 엄밀하게 말하자면 ‘고향(故郷)’이 아니다. 그러나 한국의 이승만 정권이 데모의 폭풍으로 쓰러졌던 (1960년 4월) 일도 있어 불원간 남북이 사회주의 체제로 통일될 것이니 일찌감치 北으로 가서 발판을 쌓아 두면 지도적 입장이 되어 南으로 들어갈 수 있겠다고 계산했던 사람들도 있었던 것 같다.

또 한국에서 반정부운동에 관계했기 때문에 쫓겨 일본으로 밀입국해 한국으로의 강제송환이 두려워 北으로 건너간 예도 있었다고 한다. 北의 처참한 실상이 전해지기 시작해 귀국희망자가 줄어든 이후에는 조총련 중앙·지방간부가 모범을 보이려고 집안 사람들을 귀국시키는 경우도 늘었다. 그 가운데는 조총련의장 한덕수의 딸처럼 특권계급이 들어간 소수의 예도 있었지만 다수가 사실상 인질이었다. 일본에 남은 가족은 점점 북한당국이 시키는대로 하게 되었다.

귀환수속을 하는 재일조선인들. 출처=일본정부 사진공보 1959년 10월 15일호
귀환수속을 하는 재일조선인들. 출처=일본정부 사진공보 1959년 10월 15일호

北으로 건너간 사람 가운데에는 약 1800명의 일본인 아내도 포함되어 있었다. 귀국사업 개시 당시 재일 코리안 세대의 약 20%가 일본인 처였다고 한다. 대부분의 경우 여성 쪽 집안이 결혼에 반대했으며 더구나 北으로의 이주는 더 강하게 반대했다. 그러나 조총련간부들의 "3년만 되면 일본으로 귀향할 수 있다"는 말에 속아 불안감 속에 배를 탄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북송자들은 조총련 최고간부 친족을 제외하고 거의가 도탄에 빠졌다. 성실하고 정의감이 강한사람일수록 부조리에 항의했고 그것으로 인해 무시무시한 박해를 받았다. 강제수용소에서 학대사(虐待死)내지 처형된 사람도 많았다고 전한다.

지금 미니스커트를 입고 훈련된 미소짓는 얼굴로 애교를 부리는 미녀군단 '모란봉 악단'의 개개인에게도 배후에 어떤 비극이 있는가는 알 수 없다. 그 비극은 상상할 수 없는 수준일 수도 있다.

노골적으로 유화자세를 보이기 시작한 문재인정권의 간부들에게 그런 것에 대한 감수성과 통찰력이 있을 것으로 생각되지 않는다. 한국은 급속도로 북한에 포위될 것 같다. 

jayooilbo@jay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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