⑧ 비참한 구한말 상황

나라가 앞장서서 백성들을 수탈...매년 출몰 도적떼에게도 돈 바쳐
아무리 일해도 입에 풀칠 '자포자기'...백성에게 위안 줄 종교도 없어

구한말의 한반도 상황은 비참하기 그지 없었다. 단순히 정치·경제적 문제만이 아니었다. 모든 면에서 낙후되고 열악한 상태, 철저히 붕괴한 사회였다. 생산력은 동시대 주변국들보다 뒤쳐져 있었으며, 이중 삼중의 수탈 속에 백성들은 신음하고 있었다. 가난과 전염병, 나태와 무기력이 한반도 전역을 짓누르던 시대였다. 주자학적 세계관·가치관, 그에 근거한 철저한 사농공상의 신분질서 속에 산업이 자라날 여지가 없었던 가운데, 조선은 이미 스스로 망해 있었다. 당시의 현실을 기독교 선교사들이 증언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세상의 부·명예와 무관한 가치를 추구하며 그 속에 뛰어든다. 근대적 병원·학교가 한반도의 실질적인 근대 체험의 중심이었다. 그 중심에 개신교 선교사들이 있었다.

개신교 선교사들이 찾은 1880년대의 조선은 아비규환의 생지옥이었다. 경제는 무너졌다. 정부는 ‘모든 근면성과 성실을 죽여 버리는 착취, 밑도 없고 끝도 없는 부패의 바다, 도둑질을 위한 장치’에 불과했다. 나라가 앞장서서 백성들을 수탈할 뿐만 아니라 ‘관리, 밀수꾼, 경찰, 군인… 매년 겨울과 봄이 되면 출몰하는 도적떼에게 돈을 바쳐야하는 조선의 백성들은 자포자기한 상태였다. 아무리 일을 하여도 하루살이 인생을 살 수 밖에 없던 조선의 백성들은 술과 도박에 빠진다. 윤리도덕은 땅에 떨어지고 거짓말, 사기, 부도덕이 판을 친다.

공중보건과 의료체계 역시 붕괴하였다. 열병과 피부병은 만성적으로 퍼져있었다. 영양실조와 치료를 받지 못해 방치되었기 때문이다. 결핵, 천연두, 안질환 역시 만연해 있었다. 성병, 특히 매독도 널리 퍼져 있었다. 여름이면 콜레라도 창궐했다. 정부에서 운영하던 ‘활인서’ ‘혜민서’ 같은 병원은 아무런 역할을 못한다. 그나마 활인서는 1743년, 혜민서는 1882년 문을 닫고, 병자 특히 전염병에 감염된 사람들은 집에서 쫓겨나거나 버려졌다.

구한말 무당굿을 하는 사람들.
구한말 도성 한양의 모습.

조선 말기에 천민 못지 않게 착취와 차별의 대상이 됐던 것은 여성들이었다. 조선의 여자는 ‘남자의 반려가 아니라 노예에 불과하고, 쾌락이나 노동의 연장’에 불과했다. 양반 계층의 여성들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아내와 결혼하지만 첩과 사랑을 나눈다’라는 어느 양반의 말은 당시 사대부 사회의 여성관·결혼관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김홍도의 ‘타작’.
김홍도의 ‘타작’.
김홍도의 ‘점심’.
김홍도의 ‘점심’.

당시의 조선은 문화적으로도 암흑시대였다. 중국의 문자인 한문을 읽고 쓰는 사람들은 극소수의 사대부 지배계층에 국한되어 있었다. 백성의 절대 다수는 글을 읽을 줄 몰랐다. ‘여자도 배울 수 있을 정도로 쉬워서’ 사대부들에게 천대 받던 언문(한글)이나마 읽는 사람들이 있었으나 이 역시 극소수였다. 언문으로 된 글은 질이나 양에 있어서 형편 없었다. 19세기 조선은 자체의 문학도 문화도 없는 사회였다.

착취당하고 차별당하는 조선의 백성들에게 위안을 줄 수 있는 종교도 없었다. 불교는 오랜 탄압으로 몰락하여 형해화 된 상태였다. 승려들은 천민 취급을 받았고 도성 출입도 금지되어 있었다. 남은 것은 미신 뿐이었다. "조선 사람들은 무수히 많은 각종의 악령 - 땅과 공기와 바다에 들끓는 각종 병마의 신들, 그리고 각양각색의 신 또는 귀신들"을 믿었고 "이들 악령들과 악마는 기도와 제물들을 바치며 북 치고 방울들을 울리는 등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이 많은 의식을 통하여 달래야만 한다"고 믿었다.

조선 경제의 붕괴

18~19세기 조선의 경제는 중국과 일본의 경제에 비할 수 없이 낙후 되었다. 중국은 이미 송 대(960~1279)에 화폐 경제를 정착시키면서 고도의 상업 경제를 꽃 피웠고 일본은 에도 시대(1603~1868) 고도의 상업화를 이뤘지만 조선은 19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화폐 경제도 상업화도 이루지 못한다.

도시화 역시 조선은 중국일본에 비해 형편 없이 뒤쳐졌다. 19세기 중엽 조선엔 인구 5천 명 이상의 도시 거주 인구는 총 55만 명으로, 전체 1천 6백만의 3.4%, 1만 명 이상의 도시에서 거주하는 인구는 총 40만 명으로 2.5%에 불과했다. 일본은 개국(1853년)전후 시대의 후반기에 전체 인구 3천 만 중 5백 만 명, 즉 인구의 16~17%가 인구 3천 명 이상의 도시에 살고 있었다. 인구 1만 명 이상의 도시에 사는 인구도 전체 인구의 12~13%인 4백 만에 달했다. 19세기 중엽 중국의 도시 거주 인구는 총 2천 2백 만 명으로 전체 인구 4억 3천 만 명의 5.1%였다. 송대에 비해 무려 반 이상 줄어든 비율이지만 조선에 비해선 여전히 2배 넘는 수치였다.

조선은 상업화와 도시화뿐만 아니라 농업에 있어서도 중국·일본에 형편없이 뒤져 있었다. 조선의 토지 생산성은 중국·일본에 비해 낮았을 뿐 아니라 지속적으로 하락하고 있었다. 경작지도 늘지 않는다. 정부의 세수가 줄어들면서 관개시설 확장과 보수 등 농업 생산성 개선을 위한 지속적인 투자가 이뤄지지 않았다. 농업기술 수준도 중국·일본보다 현저히 낮았다. 비료 사용 역시 지극히 제한적이었다. 19세기 중반부터는 실질 임금도 하락한다. 결국 소비감소로 이어진다.

조선 농민의 노동 강도는 중국이나 일본 농민의 노동 강도에 비해 훨씬 낮았다. 게으름 때문이 아니라 낙후된 농업 생산 체제, 수탈적인 정부 정책 때문에 노동의 대가도 보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일을 해봐야 간신히 입에 풀칠을 하고 그나마 나라에 빼앗기는 상황에서 노동의 능률이 오를 리 없었다. 인구의 절대 다수가 절대 빈곤의 기아 선상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정부의 구휼과 환곡 제도가 있었다지만 환곡 제도야말로 곧 농민 수탈의 대표적인 제도였다(19세기 조선 경제에 대해서는 제 1권, 제 2부, 제 7장, ‘1. 조선 경제의 모순’ 참조)

조선 조정의 재정은 19세기 내내 적자를 면치 못하였고 고종이 친정을 시작한 187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는 최악의 상태에 이른다. 고종은 친정을 시작한 1874년 청전 유통을 금지시킴으로써 중앙 조정은 물론 지방 행정 단위들도 파산위기로 몰고 갔다. [고종의 청전 유통 금지령에 대해서는 제 I 권 ‘6. 고종의 친정과 조선 경제의 몰락’ 참조.] 자연 재해도 겹쳤다. 1877년과 1878년은 가뭄으로 인해 기근과 도적떼가 들끓었다. 1879년에는 삼남 지방에 홍수가 덮쳐 수 백 명이 수해를 입는다. 부산과 한양에서는 전염병이 돈다. 잇따른 자연 재해로 인하여 정부의 세수가 격감하면서 조정의 재정상태는 더욱 악화된다. 재정은 고갈되고 정부 창고들은 비어갔다. 관리들의 봉급을 줄 수 없게 되고 군인들의 배급까지 중단된다.

마비된 정부

조정이 만성적인 재정 난에 허덕이면서 1870년 대 후반 내내 경제정책을 둘러싼 논의가 이어진다. 그러나 어려운 경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조선의 정치인들과 지식인들이 한결 같이 부르짖은 것은 조정의 근검 절약뿐이었다. 사림은 끊임 없이 상소를 올려 조정의 재정은 물론 왕실과 양반들의 근검 절약을 촉구한다. 다음은 1882년 5월 2일 고종과 의정부 관리들이 나눈 대화다. 관료와 군인들의 봉급을 제때에 지급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을 타개할 대책을 논하고 있다.

‘의정부에서 아뢰기를 "각 공계(貢契)에서 받을 값과 각 아문에 차하하지 못한 산료미(散料米)에 대해서 묘당에서 모조(某條)의 전(錢) 가운데서 30만 냥에 한하여 우선 조처하여 획급(劃給)하도록 명하셨습니다. 그러나 지금 저축이 바닥나서 변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자 고종은 김승규(1861~미상)에게 다음과 같이 전교한다. ‘조정 관료에게 녹봉을 나누어 주는 일과 군사들에게 급료를 여러 달 지급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그 결핍된 원인과 해결할 방책을 호조와 선혜청, 양향청의 당상관이 충분히 강구한 뒤에 묘당과 논의하여 좋은 쪽으로 품처하도록 하라."

그러자 의정부가 다시 보고 한다. "지난번 조사(朝士)에게 나누어줄 녹봉과 군사에게 나누어줄 요(料)가 모자란 원인과 수습방책을 논의하여 좋은 쪽으로 품처하라는 명을 받고 재정을 맡은 여러 신하들과 조사하면서 널리 의논한 결과, 한 해 수입을 통계해보면 지출과 맞지 않습니다. 생각건대 지금 황급한 사세는 막다른 골목에 이르러 나라가 나라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으니 국계(國計, 나라 정책)의 한심함이 어찌하여 이처럼 극도에 이른 것입니까?"

‘나라가 나라구실을 못하고’ 있으며 ‘국계’의 ‘한심함’이 ‘극도’에 이르렀다고 한다. 조정 관료들도 나라가 몰락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대안은 여전히 근검절약뿐이었다.

‘오늘날의 계책은 오직 절약하는 것뿐입니다. 연래로 그다지 긴요하지 않아서 바로잡아 정리해야 할 것은 유사(有司)의 신(臣)으로 하여금 직접 장부를 가지고 논의하여 편의에 따라 확정하게 하며, 조목조목 나열해 부(俯)에 보고하게 하고 다시 품처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국가가 백성들을 수탈하고 있음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를 그저 탐관오리들의 탓으로 돌리면서 이들에 대한 강한 처벌을 주문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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