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에서 시작된 세계사

◇‘초원의 길’을 통해서 전해진 자본주의

몽케칸(Monke, 제4대 칸, 원헌종元憲宗, 1208~59, 재위 1251~59)은 1276년, 남송(南宋)의 수도 臨安(現 杭州)을 함락시키고 남중국해까지 지배권을 넓혔다. 이로서 중국대륙 전체가 모두 몽골제국에 먹혔다.

이에 앞서 쿠빌라이 칸(Khubilai, 제5대 칸, 1215~94, 원세조元世祖, 칭기즈칸의 손자) 은 ‘大元’이라는 국호를 채용했다. 즉 이 국호는 쿠빌라이가만의 것이었기 때문에 몽골제국 전체가 원제국으로 개명했을 리가 없다.

유라시아 대륙 각지에는 그 외에도 징기스칸 분가들이 즐비하게 있었다. 이 분가들은 징기스칸이 생전에 내놓은 법령(Yasa/Yasaq)을 지키고 있어서, 그 전체가 몽골제국이었다. 제국이라 하더라도 한 사람의 황제가 중심에 앉아 전국을 통치하는 것은 아니었다.

쿠빌라이가 채용한 이 ‘大元’이라는 국호에 대해 곧잘 오해가 많다. 이 국호가 얼핏 보기에 중국풍이라서 곧잘 쿠빌라이가 중국 황제를 계승해서, 중국으로 들어가서 중국식 왕조인 원조(元朝)를 세웠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전혀 틀린 말이다.

우선 원조(元朝)는, 중국에 거의 들어가지 않았다. 원조(元朝)의 칸들은 1년의 대부분을 몽골고원을 이동하며 지냈다. 겨울에만 추위를 피하려고 大都(지금의 北京)에 체재(滯在)했다. 북경은 몽골고원에서 북중국 평원으로 내려가는 바로 그 곳이어서 중국인으로부터 연공年貢(해마다 바치는 공물)을 거두는 데도 편리한 장소였다.

◇신용이 높은 지폐(紙幣)발행

쿠빌라이칸이 대도를 건설하기 전에도, 북경에서는 금(金)나라의 중도(中都)가 있었다. 쥬센(女眞)사람들이 만든 금나라도 이곳을 발판으로 해서, 북중국의 한인(漢人)들을 지배했다. 그런데 북중국은 금나라 이전의 시대에도, 중국에서도 가장 상업이 번창했던 지역이었는데, 동광산(銅鑛山)이 없었다.

동(銅)이 없이는 거래의 결재에 사용하는 청동전(靑銅錢)을 만들 수가 없었다. 그래서 금나라에서는 화폐부족을 보완하려고 어음거래가 활발해졌고, 여기에 수반해서 신용관념(信用觀念)이 발달했다.

몽골 제국의 판도
몽골 제국의 교통로
몽골 카라코룸 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몽골 제국의 전사. /몽골=최영재 기자
몽골 카라코룸 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몽골 제국의 전사. /몽골=최영재 기자

신용은 자본주의경제의 기초다. 몽골제국의 발전과 동반하여, 자본주의경제도 초원의 길을 따라서 지중해로 전해져, 13세기에는 베네치아에 유럽 최초의 은행이 생겼다. 또 몽골제국은 상인들을 소중히 보호하면서, 교통로의 치안유지에도 열심이었다. 외국 상인은 입국할 때 한 번만 수수료를 납부할 뿐이고, 그 후에는 제국의 어디를 가더라도 관세는 물지 않았다.

또 사기(詐欺)나 강도(强盜) 때문에 피해를 입게 되면, 그 곳 몽골군주에게 호소해서 배상을 받았다. 그 때문에 몽골제국의 신용이 높아졌고, 쿠빌라이 칸은 세계 최초로 불환지폐(不換紙幣)를 발행해서 성공을 거두었다. 그때까지는 상인들이 무거운 은괴(銀塊)를 들어 날라서 결재해야만 했지만, 지폐의 출현으로 멀리 떨어진 곳과의 거래가 편리해졌다.

◇元朝의 계승국가(繼承國家)

현대 유라시아대륙의 나라들 대다수는 몽골제국이 만들어낸 것이다. 이른바 ‘계승국가’다. 중국도, 러시아도, 인도도 모두 몽골제국 계승국가다.

먼저 중국이다. 중국은 전에도 말했듯이, 12세기에 그 북쪽 반은 쥬센(女眞) 사람들의 금나라에 먹히었고, 13세기에는 나머지 남쪽 반까지도 몽골제국에 먹혀 중국인의 나라는 사라졌다.

14세기에 중국사람들의 반란이 일어나, 쿠빌라이가인 원나라가 토곤 티무르 칸(Toghon Temur, 元혜종, 1320~1370)이 1368년에, 중국을 포기하고 몽골고원 고향으로 철수했다. 그로부터 중국은 중국인인 명나라의 황제를 받들어 몽골제국으로부터 이탈했지만, 명나라는 원나라의 몽골식 제도를 그대로 이어받았다.

 

몽골의 톤유쿠크 기념비 유적과 기념비(오른쪽): 울란바토르 동쪽의 동몽골 지역에서 발원한 칭기즈칸 군대의 서진(西進)을 막던 투르크의 방어선이다. 부질 없는 방어선이다. 칭기즈칸은 이 방어선을 뚫고 서진하여 투르크땅뿐만 아니라 인도와 아라비아를 넘고 러시아와 중앙아시아·동유럽까지 모두 휩쓸어 세계 최강·최고의 제국을 건설했다. /몽골=최영재 기자
몽골의 톤유쿠크 기념비 유적과 기념비(오른쪽): 울란바토르 동쪽의 동몽골 지역에서 발원한 칭기즈칸 군대의 서진(西進)을 막던 투르크의 방어선이다. 부질 없는 방어선이다. 칭기즈칸은 이 방어선을 뚫고 서진하여 투르크땅뿐만 아니라 인도와 아라비아를 넘고 러시아와 중앙아시아·동유럽까지 모두 휩쓸어 세계 최강·최고의 제국을 건설했다. /몽골=최영재 기자
‘더는 넘어오지 말라’는 투르크의 방어선을 따라 눈보라를 맞으며 선돌이 끝없이 들판을 가로질러서 있다. 1130여개다. 투르크의 톤유쿠크 장군이 장군이 세운 돌인데 스스로 목을 벤 적군의 수만큼 이 돌을 세웠다고 한다. /몽골=최영재 기자

쿠빌라이가인 원나라는 그 후 몽골고원에서 살아남았다. 17세기가 되어서 만주사람들의 세력이 커지자 징기스칸의 자손인 몽골의 왕공(王公)들이 1636년에 심양(瀋陽)에 모여 대회의를 열고, 만주사람의 왕 홍타이지(Hong taiji=皇太極=숭덕제, 1592-1643)를 칸으로 선출했다. 홍타이지는 몽골사람들로부터 세계지배권을 물려받아, ‘大淸(다이친)’이라는 국호를 채용했다. 이것이 청조(淸朝)의 건국이다.

홍타이지

그로부터 8년 후인 1644년에 명나라 안에서 반란이 일어나 반란군이 북경으로 쳐들어오자, 명나라 마지막 황제가 자살하면서 명조(明朝)가 멸망했다. 한족(漢族)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홍타이지의 아들인 후린(愛新?羅福臨)이 불과 8세의 나이로 북경에 들어가 중국황제를 겸하게 되었다. 이것이 청조(淸朝)의 순치제(順治帝)다. 이 청조(淸朝)로부터 1912년에 정권을 인계받은 것이 중화민국(中華民國)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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