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양 아시아에서 싹튼 세계사

◇부당한 아시아 야만론

독일인 레오폴드 폰 랑케(Leopold von Ranke, 1795-1886)는 ‘근대역사학의 아버지’라 불린다. 그는 새로운 연구방법과 교수법으로 서유럽 역사서술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의 역사서술은 원사료(原史料)에 충실하면서 사실(史實)의 개성을 객관적으로 기술하는 데 특징이 있다. 그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술할 것을 강조하고, 역사란 많은 사상(事象)이 상호 관련되어 발전된 그대로를 기술해야 하며, 또 각 시대에 존재하는 독자적인 개성가치를 간파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이론은 한국의 ‘실증사학’파의 원류가 되었다.

랑케는 1854년 환갑을 앞두고 온 정열을 기울여 바바리아(Bavaria)왕국 막시밀리안 2세를 위한 역사강의를 써낸다. 랑케는 이 강의 첫머리에서 ‘역사에서 진보라는 개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라는 주제로 아시아를 이렇게 언급했다.

◇몽골에 대한 적대감

‘아시아로 눈을 돌려보자. 우리는 거기에 문화가 발생하고 있었다는 것, 또 이 대륙이 몇 개의 문화단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역사의 움직임이 전체적으로 퇴행적이었다. 아시아문화에서는, 최고의 시기가 오히려 전성기였다. … (중략) … 야만-몽고족 침입과 함께 아시아의 문화는 아주 종말을 고했다.’

또 제14강에서는 ‘당시 동양에 만연되어 있던 야만은 현재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우리는 그 정확한 실례를 여기(아시아)서 볼 수 있다.’

마르코 폴로가 동으로 떠날 대의 이탈리아 베네치아 풍경. /네이버 지식사전
마르코 폴로가 동으로 떠날 대의 이탈리아 베네치아 풍경. /네이버 지식사전

이 기술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랑케는 아시아멸시(蔑視), 특히 몽골(元)에 대한 적대감마저 있었다. 그러나 그는 유럽 그리스도교세계에 대해서는, ‘내가 도달한 근본적 사고로 절대로 옳다고 확신하는 것은 유럽·그리스도교민족의 복합체는 혼연일체로서 마치 단일국가와 같이 고려해야 되는 것’이며, 그것을 ‘서구의 그 위대한 민족공동체’라고 칭찬하며, 문화적 통일체로서 유럽 그리스도세계에 강한 자신감을 표명하고 있다.

마르코 폴로

랑케가 강의를 한 해는 1854년이었다. 당시 유럽에서 가장 뛰어난 역사가조차 유럽중심주의적 편견으로 굳어져 있었다는 것이 분명하다. 동양에서 근대역사학은 일본에서 처음 싹이 텄다. 랑케의 제자 루드비히 리스가 일본에 초대받아 1887년부터 동경제국대학에서 세계사(실은 서양사)를 강의했는데 그것이 동양에서 근대역사학이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다. 따라서 일본의 역사학에도 당초부터 서양중심주의적 편견이 들어가게 되었다.

쿠빌라이 칸으로부터 패자(토지 등기)를 받는 마르코 폴로.
쿠빌라이 칸으로부터 패자(토지 등기)를 받는 마르코 폴로.


◇대륙과 해양을 맺는 순환로

정작 랑케로 대표되는 유럽 사람들이 골수 깊이 믿고 있듯이 정말로 몽고족이 건국한 원대元代부터 아시아는 진보를 멈추고 야만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일까? 이 원나라 시기에 한 이탈리아 청년이 원나라를 방문했다. 마르코 폴로(1254-1324)였다.

그가 아버지 니코로, 숙부 마페오와 함께 고향 베니스를 떠나 상도上都(開平)에 도착한 것이 1275년, 21살 때였다. 이후 1292년에 귀국하기까지 그는 17년간 원元 쿠빌라이의 후대를 받으면서, 중국 각지를 여행했다. 그는 중국의 부에 기겁하여 그것을 상세히 기억하고 소개했다. 그 기록이 ‘동방견문록’이다. 이것이 동방에 대한 꿈을 불러 이른바 대항해시대를 촉발했다.

당시의 유럽사람들은 랑케가 ‘문화사는 종말을 고했다’고 단정한 원나라의 문명을 마르코 폴로가 가져온 문명 정보를 통해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 문명을 동경하여 동방으로 떠났던 것이다.

마르코 폴로의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이 있다. 마르코 폴로는 동양으로 가는 길은 육로, 즉 실크로드를 거슬러갔고 돌아올 때는 바닷길 즉 남중국해를 남쪽으로 내려가 동남아시아를 경유해서 베니스로 왔다. 이는 원나라 시기에 육상의 길과 바닷길을 잇는 세계 최대의 순환로(循環路)가 출현한 것을 말해주고 있다.

해상의 길은 뒤에 이 길로 운반된 물산의 이름을 따서 ‘스파이스(spice, 香辛料 후추胡椒)의 길’, ‘도자기의 길’ 등으로 불리게 되었다. 어느 방향으로 운반되었던가? 아시아에서 유럽으로였다. 문화는 높은 것으로부터 낮은 곳으로 흐른다. 이를 보더라도 아시아를 야만으로 부르는 것이 얼마나 부당한가를 알 수 있다.

원대元代에 육상 길과 해상 길이 연결된 이후, 역사의 무대가 뭍으로부터 바다로 넘어가서 해양아시아(인도양권·중국해권)가 역사의 회전축이 된다. 그 해양아시아에 참가하면서 유럽과 아시아 일부 사람들이 세계사의 무대로 뻗어나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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