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시백, 장개석·이승만 극비회동도 북에 넘겨
성시백, 장개석·이승만 극비회동도 북에 넘겨
  • 유진
  • 승인 2018.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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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시백의 조직원으로서 1949년 당시 국군 6여단 8연대 1대대장이었던 강태무가 좌익 정체 노출 직전 대대병력을 이끌고 월북, 사진은 강태무를 환영하는 북한 신문
성시백의 조직원으로서 1949년 당시 국군 6여단 8연대 1대대장이었던 강태무가 좌익 정체 노출 직전 대대병력을 이끌고 월북, 사진은 강태무를 환영하는 북한 신문
 <10> 성시백 군내 조직원 강태무·표인원 대대장, 자신들 대대병력 이끌고 월북
강태무. 이후 북한 양강도 행정위원회(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이 되었다
강태무. 이후 북한 양강도
행정위원회(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이 되었다

1949년 5월 4일과 5일에 전방에서 강태무ㆍ표무원 등 2명의 대대장이 각각 대대병력을 이끌고 월북한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들 강태무와 표무원 역시 성시백 조직원들이었다.

국군 6여단 8연대 1대대장이었던 강태무와 2대대장이었던 표무원은 육군사관학교 2기 동기생으로 공산당과 인민당, 신민당 3당 합당 때 박헌영 공산당에서 이탈하여 성시백 조직에 가담하였다.

표무원. 이후 북한에서 조선인민군 중장의 군사칭호를 받았다
표무원. 이후 북한에서
조선인민군 중장의
군사칭호를 받았다

이들은 국군 14연대, 6연대 병변이후 군대내 좌익세력에 대한 숙청이 진행되는 가운데 자신들의 정체를 알고 있던 사관학교 동기생들이 검거되어 조사를 받으면서 정체가 노출될 위험에 처하자 책임자인 성시백에게 자신들의 사정과 함께 집단 월북할 것을 제의하였다. 성시백은 이들의 집단월북 계획을 김철을 통해 북한노동당 지도부에 보고하여 허락을 받은 다음 강태무ㆍ표무원에게 구체적인 지시를 내려 실행에 옮기도록 하였다.

북한노동당 지도부와 성시백 조직의 결정 및 지시에 따라 춘천의 강태무 1대대는 1949년 5월 4일 밤에, 홍천의 표무원 2대대는 다음날인 5월 5일 밤에 월북하기로 계획하고 38선까지는 각각 대대 야간훈련을 명분으로 접근하기로 하였다.

1949년 삼팔선 모습
1949년 삼팔선 모습

이와 함께 북한지도부에서는 이들이 넘어오는 춘천과 홍천 계선의 38선 경비대에 사전 지시를 내려 그날 밤에 경비구역을 완전히 비우고 38선을 식별할 수 있는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도록 하였다. 38선을 넘어오는 국군 병력들이 38선이라는 사실을 전혀 식별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리고 대대병력들이 38선을 넘어선 다음에는 경비초소에 신속히 재배치하여 그들이 다시 남쪽으로 내려가지 못하도록 차단하였다. 물론 집단월북 과정에 38선을 넘어섰다는 것을 알게 된 일부 중대장ㆍ소대장들과 병사들이 크게 반발하면서 38선 이남으로 되돌아간 인원들도 있기는 하다.

아무튼 성시백 조직원이었던 강태무ㆍ표무원 등에 의한 2개 대대 집단월북은 기본적으로 성공하였다. 그래서 북한지도부에서는 이들의 월북을 높이 평가하고 대대적으로 환영해주었다. 그리고 6.25전쟁이 발발한 다음에는 이들에게 연대장과 사단장의 직책까지 주어 대접하였고 전쟁이 끝난 다음에도 간부로 임명하는 등 대우를 해주었다. 이와 같이 성시백 조직원이었던 강태무ㆍ표무원에 의한 2개 대대 집단월북 사건으로 남한에서는 육군 총참모장 이응준이 물러나기도 하였다.

6.25 전쟁 당시의 삼팔선
6.25 전쟁 당시의 삼팔선

이들의 집단월북이 있은 후 같은 해 9월 21일에는 미국상선 ‘스미스호’가 부산에서 화물을 싣고 인천항을 향해 가다가 월북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이 사건 역시 성시백 조직에 의한 것이다.

성시백 조직원으로서 '스미스호'의 선원으로 일하고 있던 김창선ㆍ김창규 형제와 오형기 등은 사전에 성시백을 통해 북한 지도부에 '스미스호' 상선 납치계획을 보고하고 승인을 받은 다음 납치 당일 선장과 갑판장 및 선원들을 선내에 감금하고 자신들이 배를 몰고 북한으로 들어감으로써 납치에 성공했다. 북한에 납치되어 들어간 '스미스호'는 그 후 빨치산을 이남으로 침투시키는데 사용되었으며 전쟁시기에는 수송선 역할을 하는 등 상당한 역할을 하였다.

1949년 당시의 여의도 비행장
1949년 당시의 여의도 비행장

또한 9월 24일에는 여의도 비행장에서 이륙한 L-5형 비행기가 월북한 사건이 일어났는데, 당시 조종사였던 박용규도 성시백 조직의 조직원이었고 사전 계획에 의해 감행한 것이다. 이와 함께 1950년 5월에는 육군항공대 L형 비행기 2대와 해군 소해정 ‘강철호’의 월북이 이어졌는데 모두 북한의 지령과 성시백 조직원의 공작에 의한 것이었다. 이러한 일들은 국군을 와해 약화시키기 위한 성시백 조직의 활동 가운데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성시백 조직의 군부대 월북 공작은 미국 측이 한국과 한국군을 믿지 못하게 하는 동시에 일반 군인들의 동요와 불안을 조성하기 위한 의도에서 감행된 것이다.

옛 미국 대사관
옛 미국 대사관

성시백은 대한민국의 정치, 외교, 경제 등 각 분야의 정보수집 공작도 활발히 전개하였다. 이를 위해 성시백은 서울의 각국 대사관에 조직원을 들여보내거나 기존부터 활동하는 대사관 직원들을 포섭하기도 하였다. 미국대사관에는 김우식을 비롯하여 3명의 성시백 조직원이 들어가 있었고 장개석 국민당정부가 정권을 잡고 있던 중국대사관에는 중국공산당원 출신인 김성민이 서기관으로 일하고 있었다. 김우식은 미국대사관 통역도 맡고 있었는데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었다.

1953년 자유중국을 방문한 이승만 대통령, 좌로부터 장개석, 송미령
1953년 자유중국을 방문한 이승만 대통령, 좌로부터 장개석, 송미령

이들을 통해 성시백이 성공한 가장 중요한 정보수집 공작이 바로 1949년 8월 경남 진해에서 진행된 장개석과 이승만대통령 간의 단독 극비 회동 내용을 입수하여 북한에 보고한 것이다. 이 공작은 중국대사관에서 일하던 김성민과 미국대사관에 근무하던 김우식의 합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들은 당시 이승만과 장개석 두 정상 간의 극비 회동 내용을 몰래 녹음해 그 테이프와 함께 이승만과 장개석을 촬영한 사진필름까지 평양으로 올려 보내는데 성공했다. 성시백이 보고한 고급정보 가운데는 1950년 2월 이승만대통령과 맥아더장군 사이의 도쿄 비밀회담 내용도 있었다.

이와 같이 성시백은 대한민국의 정치, 군사, 외교, 경제, 문화 등 각 분야의 기밀을 수집하여 북한에 제공함으로써 북한군의 남침계획 수립과 유격작전 수행에 막대한 도움을 주었다. 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입수한 정보와 인맥을 활용해 한국에 대한 미국의 군사, 경제 원조를 견제하고 한국을 국제적으로 고립시키는 동시에 국가기관 내부를 혼란 이간시키는 등 대한민국에 막대한 손해를 가져다주었다.

yj@jay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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