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묵 정원 9 - 번짐


번짐,
목련꽃은 번져 사라지고
여름이 되고
너는 내게로
번져 어느덧 내가 되고
나는 다시 네게로 번진다.

번짐,
번져야 살지
꽃은 번져 열매가 되고
여름은 번져 가을이 된다

번짐,
음악은 번져 그림이 되고
삶은 번져 죽음이 된다
죽음은 그러므로 번져서
이 삶을 다 환히 밝힌다
또 한 번 저녁은 번져 밤이 된다

번짐,
번져야 사랑이지
산기슭의 오두막 한 채 번져서
봄 나비 한 마리 날아온다

장석남(1965~ )

 

/게티이미지

☞수묵화(水墨畵)는 한지(韓紙)에 먹이 번져 퍼지는 효과를 얻는 방법으로 그림을 그린다. 물기의 농도에 따라 삼투압현상을 일으키며 번져가는 먹의 변화를 이용한다.

이와 비슷한 것으로 서양화의 스푸마토(Sfumato) 기법이 있다. 스푸마토란 이탈리아어로 연기 같다는 뜻의 형용사로 선을 사용하지 않고 명암법에 의해 물체의 윤곽선을 그린다. 서양미술사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이 기법을 창안했다고 기술하고 있는데, 다 빈치가 동양의 수묵화를 보았는지는 확인할 길 없다.

한지에 떨어진 먹물의 번짐은 목련꽃이나 열매뿐만 아니라 계절을 그리고 나아가 삶과 죽음마저 묘사한다. 번진다는 것은 차츰 사라지는 것이다. 그것을 다른 말로 희생이라 할 수도 있겠다. 번져서 사라진 형상은 또 다른 형상으로 돌아온다. 이것을 순환으로 바꿔 말할 수도 있겠다.

‘목련꽃은 번져 사라져 여름이 되고 여름은 다시 번져 가을이 된다.’ 번져서 사라진 것은 ‘음악’이 되어 돌아오고, 그것은 다시 번져 ‘그림’이 된다. 나아가 ‘삶은 번져 죽음이 되고’ 죽음은 다시 돌아와 ’이 삶을 다 환히 밝힌다’. 남녀 간의 사랑도 그러하다. ‘너는 내게로 번져 어느덧 내가 되고 나는 다시 네게로 번져’ ‘봄 나비 한 마리 날아오듯’ 삶은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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