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훈이 만난 사람] 이재오 국민의힘 상임고문

安에게 퇴각 명분 어떻게 제공하느냐가 관건
박근혜 前 대통령 못지않게 MB 사면도 절실
누가 되든 ‘제왕적 대통령제’ 고치자고 할 것
탄핵으로 보수 궤멸...해괴한 정권이 들어서

이재오 국민의힘 상임고문은 7일 자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퇴임한 대통령이 불행해지는 것은 권력이 집중된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단"이라며 "권력독점의 폐해를 극복하는 '분권형 대통령제'로의 개헌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김석구 기자
이재오 국민의힘 상임고문은 7일 자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퇴임한 대통령이 불행해지는 것은 권력이 집중된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단"이라며 "권력독점의 폐해를 극복하는 '분권형 대통령제'로의 개헌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김석구 기자

이재오 국민의힘 상임고문은 직선형이다. 정치를 하려면 곡선으로 우회할 줄도 알아야 한다. 그러나 그는 한 평생 그렇게 살지 않았다. 강단있는 재야의 골수운동권에서 YS(김영삼 전 대통령)의 발탁으로 1996년 총선 때 배지를 달았다. 좌에서 우로 옮긴 이념과 존재의 이동을 감행했다. 진보계열 민중당(1990년), 중도우파의 늘푸른한국당(2017년) 창당도 해봤다.

2014년 4월 8일, 이재오의 페이스북 글은 일파만파를 불렀다. 지방선거를 앞두고 기초선거 공천과 관련해 박근혜 대통령의 사과를 공개적으로 요구했다. "2012년 대선 직전 (박 대표는)기초단체장 기초의원 공천을 폐지하겠다"고 약속하고서 아무런 설명도 없이 파기했으니 ‘사과하라’고 포문을 열었다. 뒷짐을 질만한 5선 중진 때 느닷없이 현직 대통령을 직격한 거다.

이재오 고문의 뚝심과 돌파력은 타의추종을 불허한다. 불이 붙은 대선 정국 한복판에서 최근(7일) 그를 만나 현안에 대해 물었다. 미진한 부분은 전화로 채웠다.

-요즘 백신 사망 문제에 관심이 많으시죠.

"1700명 가깝게 백신 부작용으로 숨졌다. 정부가 인과관계를 인정한 건 한두 건밖에 안 되지만...세월호로 수백명이 숨졌다. 그건 뜻밖의 해상 재난이었다. 국가나 정부가 배를 침몰시킨 건 아니지 않나? 백신 접종은 정부가 사실상 강제한 거다. 그로 인해 아까운 생명들이 무수히 희생당했다. 원인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지만 국가가 저지른 타살이나 다름없다."?

이 고문과 즉문즉답은 자연스럽게 ‘K-방역’ 자화자찬을 한 문재인 대통령을 향했다. 그의 목소리는 약간 쉰 듯하다. 문 대통령의 비판으로 갑자기 그의 목소리가 카랑카랑해졌다. "방역을 과학으로 접근해야지, 정치방역을 하다 보니 오미크론 확산 대책도 제대로 못 세우고 우왕좌왕한다. 생사람 잡는 백신에만 의존하는 것도 큰 문제이고..."

D-25일, 3·9 대선 마지막 관전포인트는 윤석열·안철수 후보 간 단일화다. 둘은 13일 오전 대리인을 보내 중앙선관위에 후보 등록을 했다. 이 고문은 2021년 3월 18일 야권단일화 촉구 집회 이후 김무성,김문수와 함께 단일화에 애를 썼다. 대한민국의 밝은 미래를 위해 ‘야권이 뭉쳐, 정권을 바꾸자’는 야통정교 가능성을 물어봤다.

"결국 될 것으로 본다. 문제는 안철수에게 퇴각의 명분을 어떻게 제공하느냐다. 2027년 행 티켓을 미리 약속해줄 순 없고...새정치를 지향하는 정치개혁 방안에 동의한다든가 뭔가 신뢰를 담은 제안을 할 필요가 있다. 여당이 안철수를 묶어 놓기 위해 대통령 빼고 다 준다 했다더라. 압도적 승리를 위해선 석열과 철수 간 ‘철석연대’를 기필코 성사시켜야 한다."

두차례 TV토론에 대해 물었다. 답이 재미있다. "에이, 기업체 신입사원 면접 수준이더라. 특별히 잘한 사람도, 못한 사람도 없이 밋밋했다." 두번째는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들처럼 신경과민이었다. 그러니 토론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대통령감이 되느냐를 알고 싶을 거다. 국민에게 감동을 줄 비전이나 국정철학을 내놓아야지. 부동산이면 ‘아! 저리하면 풀리겠구나’는 식..."

필자는 33년 전, 사회부 사건기자 때 이 고문과 첫 상면을 했다. 서대문 경찰서 ‘사쓰마와리’(경찰 출입기자)시절이었다. 이 고문은 서울 은평구 대성고교에서 국어교사로 근무한 적이 있다. 당시 제자 중 한 명이 여당의원 노웅래다. 1979년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사무국장 자격으로 경북 안동댐을 방문했다.

현장에는 박정희 기념탑만 눈에 띄고 안동댐 공사 때 숨진 노동자 위령탑은 초라한 걸 보고 "이것이 10월 유신독재의 실체"라고 비판했다. 바로 남산으로 끌려가 남민전 사건에 연루돼 고문을 당하고 첫번째로 구속됐다. 1989년 창립된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의 조국통일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그때 햇병아리 기자들에게 "왜 전민련 기사를 안 내주느냐?"고 따지러 온 것이었다. 기자들은 교사 출신인 그의 소탈하고 구수한 입담에 넘어가 다들 한꼭지씩 기사를 보내 일제히 1단 기사들이 나왔다. 그의 내공이자 역량이었다. 그후 기자 몇명을 불러 점심 때 소주와 설렁탕을 먹었던 기억도 생생하다.

이 고문은 2017년 대선 때 늘푸른한국당을 만들어 정운찬을 대선주자로 세우려했다. 그러나 정운찬이 ‘부도’를 내는 바람에 본인이 덮어썼다. 대선 출마를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군소 후보였지만 ‘도토리 중 최고’라는 평가를 받았다. 재야 출신답게 진보적 통일방안 공약을 내기도 해 주목을 끌었다.

행정구역 개편에도 그는 관심이 깊다. 광역시나 도를 폐지하는 행정제도 개편안을 마련했다. MB정부 때 논의를 부치기도 했다. 전국을 50개가량 준(준) 광역시로 개편하는 게 골자였다. "마창진(마산 창원 진해)만 이 방안을 시범적으로 해본 결과는 긍정적이었다"고 진단했다.

친이계 좌장 ‘MB의 남자’라고 불린 이 고문. 질긴 생명력이 느껴지는 까닭이 뭘까? 온건보수라는 이미지를 구축한 그의 정치적 선택은 일단 돋보인다. 3·9 대선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일 거다. 정치 초년병인 윤석열 후보가 차기 대통령에 오를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상득·최시중이 영어의 처지였던데 비하면 그는 운도 좋은 편이다. MB(이명박) 사면에 대해 물었다.

"형량과 나이 양쪽으로 보면 박 대통령 못지않게 MB도 사면이 절실하다. 지금 오미크론 확산으로 다시 병원에 나와 계신다. 여권이 (노무현 죽음에 대한) 정치보복의 매듭을 풀지 않고 고집부린다. 3.9 대선 직후 당선자가 건의해 풀겠지. MB도 이 정권에서의 사면은 기대도 않는다. 국민통합의 기대를 저버리고 선별 사면한 건 정치 도의에도 맞지 않는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퇴원 후 어떤 메시지를 낼 걸로 보나, 또 만나 볼 생각은?

"나이가 지긋한 여성으로 감옥에서 고생을 많이 하셨다. 달성으로 내려간다니, 대구 본가에 가는 참에 들러 인사도 드릴 생각이다. (화해를?)아니, 무슨 감정이 있고 한 것도 아닌데...건강부터 빨리 추스르고 정상적인 생활을 하시길 빈다."

이 고문은 "내 상식으로는 선거국면에서 의미있는 언급은 하지 않으실 것으로 생각한다"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누구를 지지한다고는 않더라도 정권교체의 큰 뜻에 동의하는 메시지는 내지 않을까?’ 기대도 많다. 친이나 친박계가 흩어져 사라진 판에 야권이 정권교체에 힘을 모으는 게 중요하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마지막으로 개헌에 관해 물었다. "여야 어느쪽이 되든 대통령 퇴임 후를 불행하게 만든 ‘제왕적 대통령제’를 고치자 할 거다. 권력독점의 폐해를 극복하는 ‘분권형 대통령제’가 바람직하다. 180석 가까운 여당이 개헌론을 꺼내면 외면할 수 없을 거다. 정권 초부터 공론을 모으려 노력해야 한다. 개헌을 정략으로 반대하면 국민 기만이다."

진반농반(眞半弄半)으로 덕담(悳談)을 건넸다. "이미지도 나쁘지 않고 건강도 허락하니 2027년 대권에 다시 도전해보시라." 바로 이 고문의 현답(賢答)이 돌아왔다. "(웃음)그런 소리는 꺼내지도 마세요. 나아가야 할 때와 물러설 때를 분간하지 못하면 망신살만 뻗친다. 후진 양성을 하고 국민통합에만 힘쏟을 거다."

현 정권에 대해선 시퍼렇게 날을 세웠다. "이런 정권 하나 심판 못하는 무능한 야당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도저히 화를 참을 수가 없어서 나서게 됐다." 그는 ‘이재오의 와이러니’라는 문패의 유튜버로도 활약한다. 구독자가 4만 명이 넘는다. 자전거 마니아인 그는 트위터에 "**시장님, **대교 아래까지 자전거 길을 연장해주세요"라는 글을 남기기도 한다.

그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선거는 18대 총선. 창조한국당 문국현 후보에 패한 뒤 2년3개월 만에 ‘4선’으로 복귀한 잊을 수 없는 승부였다. 지방선거 참패와 야권 후보 단일화라는 ‘벽’을 뛰어넘으려 자전거를 타고 지역구를 훑는 ‘나홀로 선거’에 몰입했다. 하루 3시간 이상 잔 적이 없다보니, 당선 소감이 "잠 좀 자야겠다. 꿈 꿀 틈도 없었다"였다.

그는 보수통합을 위해 늘푸른한국당을 해체하고, 2018년 2월 자유한국당에 복당했다. 첫 목소리로 MB 수사를 정치보복이라고 강하게 비판한 바 있다. 12월에는 구속수감된 MB의 석방을 촉구했다. MB 정권 때 특임장관을 지냈고, 낙선 후 국민권익위원장도 역임했다.

2019년 9월 전광훈 목사가 띄운 문재인하야범국민투쟁본부에서 총괄본부장을 맡았다. 범투본에서 그해 대규모 개천절 집회를 기획했다. 그는 비폭력 평화집회를 하도록 신경을 썼다. 야당은 집회에서 빠지라고 했다. 친이계 좌장(座將)이라선지 웰빙 야당과 거리를 뒀다.

그해 12월 23일, 이문열·송복과 함께 국민통합연대를 출범시켰다. 상임집행위원장을 맡았고, 친이 비박계 정치인들도 여기에 다수 참여했다. 전광훈 목사가 창립 행사 때 축사를 했고, 이 고문은 문재인 하야 집회에 품앗이로 참가했다. 두 사람 간 케미는 좋다. 그러나 ‘군복 입고 태극기 들면서 애국...’이라며 태극기 부대와는 거리를 두기도 했다.

이재오 국민의힘 상임고문은 "야권 후보 단일화를 위해서는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에게 어떻게 퇴각 명분을 제공하느냐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김석구 기자
이재오 국민의힘 상임고문은 "야권 후보 단일화를 위해서는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에게 어떻게 퇴각 명분을 제공하느냐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김석구 기자

인터뷰를 끝낼 즈음, 이름이 있을 ‘재’-다섯 ‘오’라선지, 5번 옥살이를 했다며 미소를 지었다. 마지막이 전민련 조통위원장 때. 문익환 목사 방북 사건으로 유탄(流彈)을 맞은 거다. 전민련은 8·15 때 임진각까지 범민련 실무회담 참가를 위해 평화통일 행진을 했다. 경찰에 가로막혀 가다 서다를 반복했다. 몇 개월 뒤 그 행진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검찰이 구속했다.

사건을 수사한 서울지검 공안2부장이 최병국이고, 얼마 전 타계한 이종왕 삼성그룹 고문이 주임검사다. 출소 후 이 고문은 두 사람을 만나 술잔을 기울이며 ‘평생의 벗’으로 사귀게 된다. 두 사람도 이 고문이 문목사 사건 여파로 억울하게 구속됐다는 미안함을 느끼던 차였다. 그는 이홍구 총리를 방문해 북측과 주고받은 팩스 등을 사전에 설명하고 행사를 기획했다.

그의 글솜씨는 알아준다. 국민통합연대 선언문도 그가 직접 썼다. ‘건국 70여 년 동안 대한민국은 전세계가 부러워할 정도로 발전했다. 암울했던 시절에도 나라는 발전했고 산업화는 제길을 찾았고 칠흙같은 독재하에서도 민주화는 꽃을 피웠다. 그러나 박근혜 정권의 탄핵으로 보수는 궤멸되었고 이 나라에는 참으로 해괴한 정권이 들어섰다...’

구릿빛 피부와 짙은 눈썹의 그는 인터뷰 내내 미소를 잃지 않았다. 현 정권의 폭정과 실정에 이르러면 거침없이 분노의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독재 정권 때 지난한 ‘투쟁의 삶’을 살았던 이 고문. "싸워서 얻은 게 아니면 내 것이 아니라는 게 민주화운동하면서 얻은 교훈이다." 공짜로 얻어진 역사는 없다. "미국 역사도 미국 국민이 피 흘려 일군 거다."

감추기 힘든 ‘투사의 피’가 그의 몸속에는 흐르는 것 같다. 역사를 투쟁의 산물로 보는 시각 말이다. "그동안 4·19혁명, 5·16쿠데타, 10월 유신, 그리고 전두환 군사반란과 광주학살을 겪었다. 산업화로 먹고살게 됐지만, 자유와 인권, 민주주의가 억압됐고, 그것을 위해 싸웠고 오늘날 여기까지 온 거죠."

"없는 사람을 나아지게 만드는 것이 정치의 요체"라고 그는 설파했다. "나라의 크고 작은 권력들이 정의로워야 한다. 정의의 기준은 공직자의 부정부패가 없어지는 게 핵심이다. 기회와 사회적 조건이 공평하게 열려야만 한다. 모든 국민이 행복하게 살 권리를 누릴 수 있는 세상이 되는 게 중요하다."

재야 운동가들이 누구나 그러하듯 아내에겐 미안함이 앞선다. 결혼식부터 파행이었다고 한다. 원주MBC 문제로 밤새 농성하고 다음날 서울에 도착하니 주례가 보이지 않았다. "한 달 전에 부탁한건데 연락이 없으니 주례가 등산을 가버렸어.(웃음) 등산코스를 알기에 산으로 찾아가 ‘등산 가면 어떡하느냐’고 따지니까, ‘자네한테 사정이 생겨 못하는 줄 알았지’라고 하더라."

결혼 예복을 맞춰놓고 가봉을 못해 양쪽 팔 길이가 다른 것을 걸치고 식을 올렸다. 와이셔츠와 넥타이는 친구 것을 빌렸다. 식장에 나타난 정보부 사람이 축하금을 건네면서 속삭였다. "오늘은 축하하고. 수배가 떨어졌으니 내일부터 잡으러 갈게." 신혼여행 바로 다음날 그는 튀었다.

국회의원 할 때도 세비는 꼬박 지구당으로 보냈다. 지구당에서 아내에게 300만원씩을 보내줬다. "4선이 되면 세비 봉투를 당신 앞으로 보내겠다’ 약속했지만 그만 떨어져 버렸다.(웃음) 중앙대 초빙교수에 이어 건국대 석좌교수를 하니 월급이 집사람 통장에 입금됐다. 정치할 필요 없이 교수나 계속하라고 하더라." 가훈은 "가난하더라도 정의롭게 살자"라 했다.

영웅본색처럼 그는 투사본색이다. 검소하고 질박한 삶을 평생 살아왔다. 그가 작성한 국민통합연대 선언문에 ‘분열과 갈등으로는 미래를 열어갈 수 없다. 우리는 국민통합연대의 깃발을 들고 나라의 미래를 향해 전진하고자 한다...’새 정부 출범 후, 좌와 우의 이념과 노와 청의 세대, 영 호남의 지역 간 갈등과 대립을 풀고 우리사회의 통합을 위해 그가 큰 역할을 하길 기대한다.

이재오 상임고문이 7일 본사 최영훈 주필과 대담하고 있다. /김석구 기자
이재오 상임고문이 7일 본사 최영훈 주필과 대담하고 있다. /김석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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