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대결 신냉전 시대] 대한민국의 선택 (상)

닉슨(좌)과 마오쩌둥(우). 1972년 중국을 방문해 마오쩌둥을 만난 닉슨 미국 대통령. 당시 강경 반공주의자로 알려진 닉슨이었기에 파격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여졌다.

◇20세기 미국, 강대국에서 초강대국으로

미국은 1차 세계 대전을 거치며 강대국으로 부상했다. 유럽의 제국주의적 경합·전쟁과 거리를 두고 고립주의를 택했으나, 독일 잠수함에 미국 선박들이 심각한 피해를 입자 참전한다. 막대한 인적·물적 손실을 입은 유럽에 비해 미국은 전투나 공습의 현장이 아니었기에 피해가 덜했다. 또한 다수의 유럽 지식인·과학자·예술가의 망명을 받아들인 게 결과적으로 국가발전의 저력이 됐다.

2차 대전에선 상황의 종결자가 미국이었다. 독일과 일본의 패망을 결정적으로 만든 다음 전후 질서를 주도하고 44년간 소련과 세계를 양분한다. 휴전으로 끝난 한국전쟁, 불명예 철수한 베트남전의 그늘도 있었으나, 미국은 냉전 종식을 이끌어내 1989년 소련이 붕괴하자 지구촌 유일의 강대국으로 자리잡는다. 이라크 전쟁과 그 부작용, 금융위기 등은 시스템 개혁과 기술혁명을 통해 극복했다. 셰일가스가 발견된 것은 ‘벼락 같은 축복’이라고 밖에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 300년치 또는 그 이상으로 추정되는 매장량이며 최근 시추 기술도 크게 진전됐다. 이로써 에너지문제까지 해결한 미국은 이제 중동문제에 관여할 필요가 없다. 초강대국의 조건이 더욱 탄탄해졌다.

미국은 압도적 군사대국일 뿐 아니라, 넓고 비옥한 국토와 긴 해안선에 선진 영농·경영이 더해진 세계적 농축산 대국이며 수산물도 풍성하다. 물론 최고의 천혜는 지리적 이점이다. 양쪽으로 태평양·대서양을 끼고 북엔 같은 자유민주체제인 캐나다, 남으론 국력차이가 심한 국가들이 있다. 미국은 기본적으로 안보 걱정이 거의 없는 나라다. 게다가 이민국가이기에 건전한 인구 구성을 유지하기 좋다. 전세계로부터 젊고 우수한 인력을 꾸준히 받아들일 수 있다. 중국이 1인당 국민소득 1만불 시점에서 인구고령화를 고민하게 된 것과 대조적이다. 중국의 미래를 암울하게 보는 최대 이유로 인구문제를 꼽는 전문가도 있다.

왼쪽으로 태평양, 오른쪽으로 대서양을 긴 미국. 북쪽은 자유민주체제인 캐나다, 남쪽은 국력차이가 큰 중남미국가들이다.

◇1979년 미·중 수교

아시아 최초의 공화국인 중화민국(현 대만)과 미국은 원래 긴밀한 관계였다. 1930년대 중일전쟁 당시 중화민국을 도운 게 미국이었고, 2차 대전(태평양 전쟁)에선 일본을 대항해 함께 싸웠다. 중국대륙의 공산화 이후에도 미국의 수교국은 대만으로 밀려난 중화민국이었다. 이런 미국이 1972년 2월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방중을 거쳐 1979년 중국과 정식 수교하면서 중화민국과 단교한다. 1976년 9월 마오쩌둥의 사망으로 문화혁명이 종식되자 2년 후 중국의 개혁개방 개시, 이듬해 1979년 1월 1일 역사적인 미·중 수교가 이뤄졌다. 미국은 ‘하나의 중국’ 원칙에 동의했으며, 당시 중화인민공화국(중국)은 패권을 추구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국제정치학적으로 미·중 수교의 배경은 미·소 대결과 중·소 갈등이다. ‘소련 견제’라는 미·중의 이해관계가 일치한, 저마다의 이이제이(以夷制夷)였다. 중국은 건국 후 한동안 친소련이었으나, 1956년부터 이념 및 사회주의 진영 종주권 문제로 소련과 불화했다. 1969년 국경지역에서 무력충돌까지 벌어진다.

1979년 1월1일 미중수교. 관련 문서에 서명하는 두 정상.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우)과 당시 중국의 실세 덩샤오핑 부총리(좌).

◇미·중 밀월, 미국의 환상

중국의 개혁개방과 미·중 수교로 새 역사가 열렸다. 미·중 수교는 88서울 올림픽과 함께 소련 및 동구권의 몰락을 가속화한 추동력이다. 80년 84년 한쪽 진영만 모였던 올림픽이 오랜만에 온전한 형태로 1988년 서울에서 열렸을 때, ‘미 제국주의의 신(新)식민지’로 인식되던 대한민국의 발전상에 공산진영이 큰 충격을 받은 것은 주목할 만한 역사다. 공산권 국민들 가슴 속 체제에 대한 불만의 불씨가 기름을 만난 형국이었다.

1989년 천안문에 모여 자유화·민주화를 외치는 군중.

문화혁명 종식 후 10여 년은 공산화로 유보된 근대적 개인·자유에 대한 열망이 봇물처럼 쏟아진 백화제방(百花齊放)의 시대였다. 1989년 천안문 광장의 민주화 시위는 그 자연스런 귀결이다. 이게 유혈 진압되면서 미·중 관계도 경색됐으나 서로의 필요 덕분에 고비를 넘겼다. 덩샤오핑(鄧小平)이 개혁개방을 불가역적 방향성으로 재확인하며 중국의 고도성장은 본격화된다.2001년 미국의 적극적 도움으로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해 날개를 달았다. 2008년 미 국채 최대 보유국이 되더니, 2010년엔 일본을 제치고 세계 2위 경제국으로 뛰어오른다.중국 개혁개방 30 여년 만의 일이었다.

◇중국몽=패권의 꿈?

그러나 중국은 국가 전반의 시스템 개혁에 미온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개혁개방 35년만에 나온 ‘일대일로(一帶一路)는 독자적 육로·해상권 장악의 세계 전략이다. 미국 패권에 대한 도전이자 ‘항행의 자유(자유무역)·달러 결제’라는 전후 세계 질서의 기본을 뒤흔드는 사태로 받아들여졌다. 2010년대 들어 남중국해에 대한 군사적 영향력 증가도 문제다. 자원이 풍부하고 중요한 해상 교역로인 남중국해는 최근 전운이 감도는 곳이다. 이곳이 중국 영해가 되면 통상으로 먹고사는 대한민국에겐 치명적이다. 2017년 10월 두번째 임기를 맞이한 시진핑 주석은 종합 국력과 영향력에서 세계를 이끄는 "위대한 현대 사회주의국가" 건설을 선언했다. 패권을 추구하지 않겠다던 개혁개방 초기의 공언은 빈말이 됐다. 미·중 충돌은 불가피한 현실이다.

◇‘애국=애당’으로 내부모순 돌파?

중국공산당은 자타공인 ‘민족해방’ ‘계급해방’의 완성자였다. 그래서 ‘민족 팔이’를 할 필요가 없었는데, 급격한 경제성장으로 빈부격차가 심해지자 ‘애국’이 소환되기 시작한다. 체제의 본질적 한계와 성장 둔화로 가중된 내부 모순의 은폐에 애국심 고양만큼 효과적인 게 없었다. 산업화시대에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긴 하지만 중국의 경우 전 지구적 파급력이 너무 크다. 어느새 ‘중국몽’은 중세적 중화주의에 근대적 제국주의가 더해진 패권추구의 논리가 됐다.

애국애당. 당은 내 가슴에, 영원히 당과 함께.
"어려서부터 당의 역사를 배워, 영원히 당과 함께." 공산당에 대한 사랑을 강조하는 포스터.

중화인민공화국은 중국공산당이 세운 나라, 그래서 국가보다 당이 위에 있다. 군대도 국군 대신 ‘당의 군대’ 즉 홍군(紅軍, 인민해방군)이다. 중국에서 나라사랑은 중국공산당에 대한 사랑이고 궁극적으론 세계 최강대국이 되겠다는 꿈이다. 그게 중국몽의 실질적 내용이며, 스스로 강조해온 ‘아편전쟁 이래의 굴욕’을 씻는 궁극의 방식이기도 하다. 그 방식은 이제 ‘반일’ ‘반미’를 부추기는 형태로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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