깃발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애수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아 누구던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유치환(1908~1967)

 

/게티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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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환 시인은 한국근현대사의 굴곡을 온몸으로 받아낸 시인이었다. 일제시대 일본으로 건너가 공부하고 귀국한 뒤 연희전문 문과에 입학했으나 1년 만에 중퇴했다. 그 후 이런 저런 직업을 전전하다 부산에서 문예동인지를 결성·활동하던 중 첫 시집 ‘청마시초(靑馬詩抄)’를 간행했다. 여기에 대표작 ‘깃발’이 실려 있다. 그 후 가족을 거느리고 만주로 이주하여 농장 관리인으로 일하다 광복 직전 귀국했다. 6·25가 발발하자 문총구국대(文總救國隊)의 일원으로 보병사단에 종군하면서 시집 ‘보병과 더불어’를 썼다. 문총구국대란 ‘반탁지지, 이승만 대통령 지지, 민족정신 함양, 한국문화의 독자성’ 등을 강령으로 하는 문화단체였다. 종전 후 고향 통영으로 돌아와 교편생활을 하던 중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깃발’은 이상세계의 염원을 노래한 시다. 시 문장 전체를 통틀어 서술어가 ‘날개를 펴다’ 하나밖에 없다. 남성의 힘찬 필치와 여성적 부드러움을 아울러 갖춘 절제미의 극치를 보여준다. 시어 하나하나가 정교하게 쌓은 성채의 벽돌처럼 빈틈 없고 한 단어만 빠뜨려도 시의 구조는 와해된다. 거기다 음악성까지 갖춰 음유하기 쉽다. 한마다로 ‘깃발’은 한국시사(詩史)의 금자탑이다.

시의 구성은 단순하다. ‘저 푸른 해원’은 시인이 지향하는 이상세계다. 거기에 닿기란 지난(至難)한 일이고, 시인이 속한 곳은 ‘소리 없는 아우성’의 세계 즉 자유주의와 사회주의가 극한대립으로 치닫는 혼돈의 세상이다. 따라서 ‘저 푸른 해원(海原)’에 이르기 위해서는 ‘소리 없는 아우성’을 넘어서야 한다. 깃발은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처럼 언제나 이상세계를 향해 나부끼고 있다. 깃발을 매단 봉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그것은 곧 자유와 순수의 다른 이름이다. 시인은 그것을 볼 때마다 ‘백로가 날개를 펼치듯’ 서글픈 시름에 휩싸인다.

시인은 마침내 결론에 도달한다. 자유와 순수의 이상세계에 이르는 길은 한계를 목도(目睹)하는 덧없는 과정일지 모른다. 그렇긴 하지만 자유와 순수를 향한 의지는 멈출 수 없고, 나보다 먼저 자유와 순수의 깃발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선구자들을 기억해야 한다고 노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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