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상위 5%의 양복기술 명장, 이동만 장로의 성공비결은 ‘감사의 삶’

가정형편 어려워 들어갔던 미션스쿨...양복 일 하던 친형들 도와 심부름하며 일 배워
상경하는 아들 손에 성경 꼭 쥐어주신 어머니...개업 꿈 품고 호랑이 선생님께 배움 자청
양복 일 50년·개업 33년...감사의 삶으로 ‘대한민국 상위 5%의 양복기술 명장’ 반열에

이동만 장로. /엄무환 기자
이동만 장로. /엄무환 기자

우리나라 상위 5%에 속한 사람들의 명품양복 만드는 일을 자신에게 주어진 업(業)으로 알고 이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이가 있다. 양복 기술 명장이자 체스타필드 강남점 대표인 이동만 장로(광야교회)다.

이 장로의 삶을 들여다보면 부모님의 신앙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하나님께서 한 사람의 삶을 통해 영광 받으시기 위해 어떻게 간섭하시는지를 다시금 깨닫게 된다.

◆가정형편 어려워 들어갔던 미션스쿨...양복 일 하던 친형들 도와 심부름하며 일 배워

1955년 9월 2일 전북 김제시 죽산면 종신리 종남부락에서 3남1녀(형2, 여동생1) 가운데 셋째 아들로 태어난 이동만 장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난 이 장로는 7살 되던 해에 아버지가 병으로 세상을 일찍 떠나셔서 가정경제의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다. 졸지에 가장이 되신 어머니는 그러나 믿음으로 혹독한 고생을 감내하시며 자식들을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헌신하셨다.

“어머니께서 막내아들인 저만큼은 목사가 되길 원하셔서 김제에 있는 미션스쿨인 고등공민학교(중학교)로 진학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고등공민학교를 택한 또 다른 이유는 가정형편이 어려워서였습니다.”

당시 이 장로의 첫째 형은 서울에서 양복 재단사 일을 했고, 둘째 형은 고향인 죽산에서 양복점을 직접 운영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 장로도 자연스럽게 형님 가게에서 양복 일을 돕는 심부름을 시작하게 됐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장로의 삶을 뒤흔든 중요한 사건이 발생했다.

“한 달 결재금을 받아 형에게 전달하기 위해 가는 중에 나쁜 선배에게 돈을 전부 빼앗겨 버렸습디다.”

이 사건으로 인해 그의 어머니가 이 장로에게 자신의 몸 정도는 자신이 지킬 줄 알아야 한다며 태권도를 배우라고 권면하셔서 운동을 시작하게 됐다. 하지만 그때부터 공부에 점점 흥미를 잃은 이 장로는 검정고시를 볼 여력도 안 돼 결국 고등학교 진학을 하지 못했다. 

◆상경하는 아들 손에 성경 꼭 쥐어주신 어머니...개업 꿈 품고 호랑이 선생님께 배움 자청

고등학교 진학을 하지 못한 이 장로는 17살 때 서울로 상경해 양복점을 하고 있던 큰형을 찾아간다. 이때 이 장로 어머니는 이 장로의 손에 성경·찬송가를 쥐어주시며 당부의 말씀을 하셨다.

“어머니께서 제가 취직을 하게 되면 십일조는 고향의 본교회로 보내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십일조가 매달 본교회로 잘 오면 ‘막내아들이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구나’ 생각할 수 있고, 십일조가 끊어지게 되면 신앙생활과 멀어졌다고 생각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서울에 상경해 취직 후 십일조를 본교회로 꾸준히 보내다보니 어머니께서 어느 시점에서 저를 신뢰하시고 ‘이제 네가 서울에서 출석하는 교회에 십일조를 하여라’하고 말씀하시더군요.”

심부름으로 시작해 바지 만드는 일과 자켓만드는 일을 하게 된 이 장로는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한 1979년도 말에 마침내 재단 기술을 배우기 위해 공장에서 매장으로 내려가게 된다. 당시 그가 일하던 ‘체스타필드 양복점’은 본점 외에도 신라호텔점, 워커힐호텔점, 소공동점, 광화문점 총 네 군데 프랜차이즈 지점이 운영되고 있었다.

“저는 ‘꼭 본점에 취직하겠다’고 다짐하며 기다리던 중 드디어 체스타필드 본점의 가장 훌륭한 재단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저의 선생님은 아주 무섭기로 소문나고 호랑이같은 성격을 가지셔서 그 선생님 밑에서 2년을 버틴 제자가 한 명도 없었습니다. 저는 ‘내가 35살(1989년)이 되는 해 가을에 꼭 양복점을 개업할거야’ 하는 목표를 마음에 품고 무섭기로 소문난 호랑이 선생님께 배움을 자청했습니다.”

◆양복 일 50년·개업 33년...감사의 삶으로 ‘대한민국 상위 5% 양복기술 명장’ 반열에

이 장로가 양복 만드는 기술을 갖추자 여러 양복점에서 스카웃 제의가 들어왔다. 받고있는 월급의 곱을 준다는 제의도 있었지만 이 장로는 자신의 사업장을 갖겠다는 목표가 있었기에 모두 거절했다.

“선생님께 재단기술을 배우기 시작해 9년이 되던 해인 1989년에 마침내 개업의 꿈을 이루었습니다. 원래 그해 가을에 개업하려고 계획했는데 6개월이나 시기를 앞당긴 3월에 오픈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1989년 3월에 개업한 체스타필드 강남점은 33년의 세월이 흐른 2022년 2월 현재까지 서울 강남구 언주로 146번길 동현아파트 정문 앞에 자리잡고 있다.

체스타필드 강남점. /엄무환 기자
체스타필드 강남점. /엄무환 기자

“17살 때 양복일을 시작했으니까 양복 일은 50여 년, 제 가게를 오픈한 지는 33년이 되었네요. 처음 양복을 함께 시작했던 대부분의 동료들은 현재 양복업을 떠나 다른 업을 하고 있습니다”

“처음 가게를 오픈했을 때 집에 화장실이 없어 공중화장실을 이용해야 하는 빈민가에서 가족들과 지냈습니다. 그러나 그때 제가 모시던 고객들은 대한민국 최상위층 분들이었습니다. 출근하면 고객 출장을 위해 그 당시 최상위층이 모여 살던 성북동을 자주 방문하였습니다. 그러다가 퇴근할 때는 빈민가로 퇴근을 하는, 말하자면 낮에는 최상위층 밤에는 빈민가였던 셈이지요. 하지만 저는 이러한 환경을 탓하지 않고 이런 삶에서도 감사할 점이 있다며 감사하는 삶을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이 장로의 고백처럼 이 장로의 삶을 통해 전달되는 메시지는 ‘감사하는 삶’이다. 이 삶은 부부관계에도 그대로 적용됐다. 

“결혼해서 지금까지 아내(이은자 권사)와 단 한 번의 다툼도 없었습니다. 저는 1남 2녀의 자녀를 두었습니다. 첫째 딸(40세)과 둘째 딸(36세)은 결혼해서 출가했고, 셋째인 아들(30살)은 저의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지금의 제가 있기까지 묵묵히 희생만을 감내한 아내 덕분이라고 항상 하나님께 고백합니다. 너무 고맙고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양복일을 하나님이 주신 천직(天職)으로 받아들여 자신의 인생을 올인한 이동만 장로. 그는 감사의 삶으로 부부관계는 물론 마침내 대한민국 상위 5% 안에 드는 사람들의 양복 만드는 기술 명장의 반열에 우뚝 섰다. 그리고 그의 아들(이명찬)은 국가공인 양복기능사로 아버지의 업을 이어가고 있다.

이동만 장로(왼쪽)와 아들 이명찬(오른쪽). /엄무환 기자
이동만 장로(왼쪽)와 아들 이명찬(오른쪽). /엄무환 기자

◆가장 기억에 남는 고객은 ‘한경직 목사님’...“92세 때까지 양복 지어 드렸죠”

이런 이 장로의 삶을 보며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이 있다.

“평소 저의 모습을 보고 예수님을 영접한 분이 계십니다. 김진업 씨라고. 그분이 65세 때 하나님을 믿기 시작하였습니다.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이 장로가 만든 양복을 입은 고객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고객이 누구냐고 물었다.

“저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고객은 한경직 목사님이십니다. 제가 만든 양복을 입으시고 설교하시며 목회하시는 모습을 볼 때 얼마나 감격스러웠는지... 한경직 목사님은 92세 때까지 제가 양복을 지어드렸습니다.”

이와같은 이동만 장로의 신앙간증적 삶이 방송을 통해서도 소개됐다. 지난 15일 오전 11시와 16일 오후 3시에 방송된 C채널 ‘힐링토크 회복플러스’를 통해서다. 21일부터는 유투브에서 ‘힐링토크 회복플러스 이동만’을 검색하면 직접 시청할 수 있다.

양복업에서 뿐 아니라 가정사역과 사회활동에서도 명장의 반열에 오른 이동만 장로, 그를 만나면 하나님께서 빚으신 인생이 얼마나 아름다운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내는지 보게 될 것이다.

이동만 장로와 그의 가족들. /엄무환 기자
이동만 장로와 그의 가족들. /엄무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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