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티이미지
/게티이미지

‘교양’은 독일어 ‘빌둥Bildung’의 일본어 번역 ‘kyoyo敎養’에서 왔다. 형성하다·만들다  등을 의미하는 ‘빌덴bilden’의 명사형이 ‘Bildung’이다. ‘교양 있는 사람’ ‘교양 없는 태도’, ‘(대학교) 교양과정’ 등의 쓰임이 한국어 일본어는 완전히 일치한다. 반면 중국어에선 ‘가르칠 敎-기를 養’, 글자 그대로의 동사 또는 ‘교육 배양敎育培養’의 준말이다. 요즘 중국어 사전엔 ‘Bildung으로서의 敎養’ 의미도 실려 있지만, 중국인들에게 더 친숙한 표현은 ‘문화(wenhua文化)가 있다, ~ 없다’이다.

한국 일본의 ‘교양학부’ ‘교양수업’ 등의 용법이 독일어 어원을 잘 드러낸다. 19세기 후반에야 통일국가가 된 독일은 선진국 영국 프랑스에 비해 신분질서·지방색 등 중세적 후진성을 상대적으로 많이 간직한 곳이었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를 자살하게 만든 배경엔 ‘이룰 수 없는 연애’뿐 아니라 ‘계급 스트레스’도 크게 작용했다. 베르테르처럼 고귀한 신분을 타고 나지 않은 시민 계층은 자신의 가치를 ‘지식과 문화 존재감’으로 증명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스·로마 시대 이래의 철학·문학·예술 등 인문학 전반에 대한 조예와 예의범절이야말로 귀족·중산층 부호를 압도할 수 있는 ‘우아함’ ‘존엄’의 근거였던 것이다. ‘교양’을 쌓은 시민 출신이 귀족들에게 인정받아 관리가 되거나 고관의 보좌관으로 취직하곤 했다. 문호 괴테도 그런 예에 속한다.

‘교양’이란 신분적 열세를 만회하기 위한 노력이었다는 점에서 ‘속물적’ 측면이 있지만, 꼭 나쁘게만 볼 필요 없다. ‘교양 있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 노력하다 보면 정말 그렇게 될 수 있다. ‘교양’ ‘교양에 대한 욕망’이야말로 ‘만물의 영장’ 사피엔스의 두드러진 특징 아닐까. 더구나 ’교양’은 ‘후천적으로 키워지는 것’이니 기본적으로 ‘평등’하다. 19세기 후반 독일에게 인재 양성은 국가적·시민적 과제였다. 그 바람이 ‘Bildung’ 관심으로 구현되고 ‘Bildungsmus(교양주의)’를 낳는다. 당시 비슷한 처지의 일본으로선 적극 차용할 만한 영감이자 콘텐츠였다. 일본을 통해 우리나라에 수입되는 감성·논리 역시 유사하다.

근대 일본의 꿈은 영국 류의 선진국이었지만 당면 목표에선 독일의 방법론이 효율적이었다. 영문학과 독문학의 사회적 위상 역시 그 영향을 받는데, 우리나라에선 해방 이후 나타나는 현상이다. 1980년대 후반까지 세계문학 하면 괴테나 헤세, 클래식 하면 바흐와 베토벤를 먼저 떠올렸다. 대한민국은 한 때 인구 대비 독문과 출신이 제일 많은 나라로 꼽히기도 했다. 근대 ‘교양주의’의 전통을 가장 늦게까지 간직한 선진국인 셈이다. ‘교양’의 본래 함의(인격완성)를 되살리며, 과거·현재를 해석하고 미래를 열어나갈 ‘인문학 소양’으로 재구성해 나가야 할 것이다. 

저작권자 © 자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