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사의 이단아들]오직 자연의 제자였던 화가 지오토(Giotto di Bondone)
[예술사의 이단아들]오직 자연의 제자였던 화가 지오토(Giotto di Bondone)
  • 박석근 문화 에디터
  • 승인 2018.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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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과 물고기의 기적. 520년경. 모자이크.
빵과 물고기의 기적. 520년경. 모자이크.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1세의 사망 이후 동·서로 분열된 중세 로마제국 중 동로마 제국(330~1453)을 비잔틴제국이라고 한다. 비잔틴 제국이라는 용어는 역사학자들에 의해 붙여진 명칭으로, 제국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플의 고대 지명에서 유래한다.

콘스탄티노플은 과거 1600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던 오스만 제국의 수도였다. 오늘날 터키의 수도는 앙카라로, 1926년 혁명에 의해 새로 수도 지정되었다. 이스탄불(콘스탄티노플의 현대식 명칭)은 오늘날에도 터키의 경제와 문화의 중심지로 인구가 천만이 넘는 터키 제일의 도시이다. 콘스탄티노플 문화는 헬레니즘을 기조로 했으며, 언어, 문화, 생활면에서 그리스의 전통을 많이 따랐다.

730년 시리아 출신의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레오3세는 성상의 숭배를 금하는 칙령(성상금지령)을 발표하였다. 그것은 구약의 모세 십계명에 열거되어 있는 "우상을 짓지 말라"가 근거로서 원용되었다.

725년에 계속된 심각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성상숭배금지령을 내린 레오3세(717~741)
725년에 계속된 심각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성상숭배금지령을 내린 레오3세(717~741)

그러나 이 칙령은 제국의 소아시아 일부 지역과 일부 성직자, 지식인에게는 지지를 받았으나, 고대 그리스 문화의 전통을 고수하려는 지방은 반발이 심했다. 게다가 교황이 있는 서로마교회는 포교 활동의 경험상 게르만족의 교화를 위해서 성화나 성물이 필요했다. 더구나 게르만족은 문맹이 대부분이었다.

서로마 교회의 성상파괴 반대는 단순히 게르만족에 대한 포교 문제만은 아니었다. 서로마교회는 베드로가 로마에서 순교한 이래 기독교의 정통은 로마에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거기다 로마는 제국의 발상지였다.

그런데 콘스탄티누스 1세가 수도를 옮긴 후 비잔틴 제국은 로마보다 정치적으로 우위에 있었다. 또한 게르만족으로부터 보호해준다는 핑계로 비잔틴 황제는 지속적으로 로마를 간섭하고 규제했고, 서로마교회는 그것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서로마는 비잔티움 제국 황제의 간섭에서 벗어나고 싶었으나, 명분과 실질적으로 자신들을 후원해줄 후원자가 없었다. 그러던 차에 레오3세의 성상파괴 령은 그들에게 확실한 명분을 제공했다.

레오3세의 아들 콘스탄티누스5세는 아버지의 유지를 이어 성상파괴 령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가차 없이 탄압하고 처형했다. 그러나 논쟁과 반대의 목소리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결국 이 논쟁은 비잔티움 제국을 양분시키는 내전을 초래하였다. 기독교가 동방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으로 갈라지게 된 것이다.

성상파괴운동은 16세기 유럽에 불어닥친 종교 개혁시기에 서방 교회에서 재현되었다. 그림은 1524년 취리히에서 개신교도들에 의해 진행된 성상파괴운동을 나타낸 것이다.
성상파괴운동은 16세기 유럽에 불어닥친 종교 개혁시기에 서방 교회에서 재현되었다. 그림은 1524년 취리히에서 개신교도들에 의해 진행된 성상파괴운동을 나타낸 것이다.

한편 성상파괴령에 대한 문화적인 논쟁도 정치적인 논쟁 못지않았다. 이 대립은 오리엔트의 종교였던 기독교가 그리스적으로 변해가는 도중에 발생한 사건이었다.

예술의 모방적 활동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누그러졌으나, 성상파괴논쟁으로 인해 또다시 예술의 모방적 활동에 대한 논쟁이 시작된 것이었다. 플라톤은 예술 활동으로서의 모방을 낮게 평가했다.

성상파괴논쟁은 그림이나 부조, 조각 등으로 신의 모습을 만들어 교회 안에 전시해도 괜찮은가 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이었다. 교회 안에 성상을 두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성상파괴론 자들은 플라톤의 주장을 그대로 답습했다. 즉, 예술은 진리와 거리가 멀고 판단력을 흐리게 하며, 따라서 신의 모습을 그림이나 조각, 부조 따위로 묘사된 성상은 진리가 아닐 뿐만 아니라 그것을 보는 사람의 정신을 흐리게 만든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교회에 성상을 두어도 좋다고 주장하는 성상 옹호론자들은 교육적 효과를 예로 들었다. 사람들은 대부분 문맹자들로 성경을 읽을 수 없으므로 교회의 벽면에 성경의 주요한 내용을 조각으로 새기거나 그림을 붙여놓는다면 그 효과는 매우 클 것이다. 성서를 읽는 것이 좋지만, 그림을 보는 것 또한 교리를 이해하기 쉽다. 교황 그레고리는 “그림은 글자를 모르는 사람에게 책이 해주는 역할을 대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끝날 것 같지 않던 성상파괴 논쟁은 787년에 콘스탄티누스5세의 아들 레오4세의 황후이자 비잔티움의 여제 이레네가 주재한 제2차 니케아공의회에서 성상공경의 정통성이 확인되며 파괴가 금지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니케아 공의회
니케아 공의회

그 후 비잔틴 제국에서 또다시 제2차 성상금지령이 발해져서 815년부터 843년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나 이미 소아시아에서 성상파괴 운동은 힘을 잃었고 결국 성상공경 신앙의 전통이 부활하였다.

성상옹호론자의 활약에 힘입어 성화는 단순히 포교의 수단을 넘어 신성(神性)의미를 띠기 시작했다. 이로써 종교미술은 본격적으로 발전할 명분을 얻게 되었다. 당시의 회화는 정해진 도상학적 이콘(icon)에 따라 그려지게 되었다. 이콘이란 종교·신화 등 특정한 의의를 지니고 제작된 미술양식이다. 기독교와 불교에도 특유의 도상(圖像)이 있는데, 8세기경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하는 동로마 교회미술이 특히 강하게 나타난다.

중세 미술은 이처럼 도상학(圖像學)이 바탕이 된 미술로 발전했다. 그것은 예수의 삶을 강조한 것으로, 교회가 도상의 규범을 제시했다. 또한 회화의 주제는 교회 안에서 각각 정해진 장소에 배정되었다. 예술가들은 과거 이집트 예술가들처럼 작품을 제작하는 데 있어 엄격하게 전통과 규범을 지켰다.

우리는 중세 예술에서 큰 교훈을 얻는다. 그것은 예술이 목적을 가지거나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예술이 목적을 가지거나 수단이 되면 예술은 발전을 멈추고 퇴보한다.

역사를 돌아보면 전체주의 국가들이 예술을 국가의 이념의 확립이나 강화의 수단으로 이용했다. 전체주의란 개인은 전체 속에서 비로소 존재가치를 가지며, 강력한 국가권력이 국민생활을 간섭하고 통제한다.

전체주의라는 용어가 일반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 후반부터이다. 당초에는 이탈리아의 파시즘, 독일의 나치즘, 일본의 군국주의 등을 가리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오늘날 전체주의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유일하게 북한만은 변하지 않았다.

북한의 정치선전화
북한의 정치선전화

중세 후기 일부 예술가들은 종교적인 규율과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려 시도했다. 그 선구자가 지오토(Giotto di Bondone, 1267~1337)였다. 지오토는 당시 작품 제작에 반드시 지켜야 할 화법이나 규범을 차츰 버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예술을 원래의 자리로 돌려놓으려는 의지의 반영이었다.

지오토가 활동한 13세기 말부터 14세기 초는 고딕시대의 마지막과 르네상스의 시작이 겹쳐지는 지점이었다. 지오토 이전에 이탈리아 회화를 지배한 것은, 비잔틴 양식이었다. 화가들은 엄격하고 근엄하며 규범적인 중세적 관습을 벗어나려 시도했다. 지오토는 그러한 시대변화의 첨단에 서 있었다.

애도. 1305년. 프레스코, 스크로베니 예배당. 이탈리아 파도바
애도. 1305년. 프레스코, 스크로베니 예배당. 이탈리아 파도바

‘애도’는 예수의 시신을 둘러싼 인물들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슬픔에 잠긴 사람들 가운데 등을 보이고 있는 인물은 정면만을 응시하는 비잔틴양식의 인물묘사 방식에서 벗어났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성인들의 후광을 금박으로 처리한 것, 금빛 의상 등에서 중세적 요소가 잔존한다. 거기다 공간묘사에 과학성이 결여되었는데, 이것은 르네상스 시대에 가서 해결될 과제이다.

붙잡히는 예수. 1305년. 프레스코. 이탈리아 파도바 스크로베니성당.
붙잡히는 예수. 1305년. 프레스코. 이탈리아 파도바 스크로베니성당.

‘붙잡히는 예수’는 예수의 체포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군인들이 횃불과 무기를 들고 예수를 잡으러 왔을 때 유다는 포옹으로 예수가 누구인지를 가르쳐 준다. 그 옆에는 예수가 잡히는 것을 보고 흥분한 베드로가 대제사장 몸종의 귀를 칼로 잘라 버린다. 순차적으로 일어난 두 사건을 한 화면 좌우에 그려 넣어 스토리성과 긴장감을 높였다. 유다의 가식적인 표정과 준엄한 예수의 표정이 대비될 뿐만 아니라 각 인물들 얼굴 또한 개성적으로 표현되었다.

지오토의 업적은 당대 화가들의 업적을 월등히 뛰어넘은 것이었다. 그는 그 이전의 화가들과 양식(style)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리하여 후대 평론가들은 그를 가리켜 “오직 자연의 제자였던 사람”라는 칭송이 따라붙었다.

sgp@jay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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