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일서정(秋日抒情)


낙엽은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
포화에 이지러진
도룬 시의 가을 하늘을 생각게 한다.
길은 한 줄기 구겨진 넥타이처럼 풀어져
일광의 폭포 속으로 사라지고
조그만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새로 두 시의 급행열차가 들을 달린다.
포플라나무의 근골(筋骨) 사이로
공장의 지붕은 흰 이빨을 드러내인 채
한 가닥 구부러진 철책이 바람에 나부끼고
그 위에 셀로판지로 만든 구름이 하나.
자욱한 풀벌레 소리 발길로 차며
호올로 황량한 생각 버릴 곳 없어
허공에 띄우는 돌팔매 하나.
기울어진 풍경의 장막 저 쪽에
고독한 반원을 긋고 잠기어 간다.

김광균(1914~1993)

 

/게티이미지
/게티이미지

☞푸틴의 명을 받은 러시아 군대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세계가 충격에 휩싸였다. 포화 속 붉은 피 비린내가 여기 한반도까지 진동한다. 새삼 역사는 반복된다는 진리를 되새기게 하는 사건이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옛사람 말은 조금도 틀리지 않았다. 도둑이 언제 들지 아무도 모르니 깨어 있으라는 성경 말씀도 옳았다.

‘추일서정’의 배경이 된 전쟁은 1939년 히틀러의 폴란드 침공이었다. 이 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 서막을 올렸고, 김광균은 그 이듬해 ‘인문평론’ 지에 이 작품을 실었다. 마치 한 폭의 회화를 감상하듯 시 전체를 통틀어 비유법이 쓰이고 있다. 이 시의 첫 행 ’낙엽은 폴란드 망명 정부의 지폐’는 뒹구는 낙엽과 망명정부의 쓸모없어진 지폐의 의미가 중첩되어 쓸쓸하고 공허한 효과를 더한층 높인다. 회화적 이미지는 사물뿐만 아니라 관념과 심리의 추상성마저 시각적 이미지로 바꾼다.

시를 관통하는 것은 짙은 허무감이다. 이러한 가을서정은 점차 사라져가는 소멸의 이미지로 정리된다. 가을날의 서정을 단순히 회화적 이미지로 포착한 것이라기보다 역사적으로 반복되는 전쟁의 참화와 허무, 그리고 그것을 넘어 인간의 원초적 고독과 우수를 노래한다.

저작권자 © 자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