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적 리더십 갖췄던 정연행·이웃사랑 몸으로 실천했던 문준경

/문준경전도사 순교기념관
/문준경전도사 순교기념관

“목격담에 따르면, 공산당원들이 정연행 전도사에게 죽창과 총칼을 들이대며 ‘지금이라도 예수를 모른다고 말만 해라. 그러면 살려주마’라고 회유했다고 한다”며 “그러나 끝까지 신앙을 포기하지 않은 그녀는 다른 신자들과 함께 살해당한 뒤 일본군이 파놓았던 방공호에 매립됐다.”

“당시 공산주의의 등장으로 심각한 사상적 혼란 가운데서 성결교회는 강력한 반공의 입장을 견지했었다. 문준경 전도사 등 신안 지역 목회자들은 어려운 사람들을 보살피면서 기독교의 이웃사랑을 몸으로 실천하고자 했다. 이후 1950년 10월 4일, 이봉성 전도사의 만류에도 전남 신안군 증동리로 돌아간 문준경 전도사는 공산당원에 붙잡혀 다음날인 5일 처형됐다.”

6.25 전쟁 당시 끝까지 신앙을 지키며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며 순교한 여 전도사들의 사연이 ‘한국전쟁 전후 기독교 탄압과 학살 연구’ 보고서를 통해 알려졌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서울신학대학교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 박명수 교수팀에 의뢰해 지난해 10월에 발간된 이 보고서에서는 한국전쟁 기간 동안 남한 내 기독교인 1145명이 북한 공산당원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는 공식적인 연구결과 등과 함께 두 여전도사의 이야기를 상세하게 전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전북 군산의 전연행 전도사는 이 지역에서 원당교회(1927년)·해성교회(1928년)을 세운 뒤 전북 여전도회 연합회장으로 활동할 만큼 기독교적 리더십을 갖춘 여성 인물이었다. 

해방 직후 제4사단 공산당 세력은 군산을 장악하면서 원당교회를 인민위원회 사무실로 사용한 채로 정연행 전도사에게 ‘예수 믿지 말고 여성위원장이 되어줄 것’을 요구했다. 이후 한국 전쟁이 발발하면서 주변의 피난 권유에도 불구하고, 정 전도사는 “다 피난가면 누가 이 교회를 지키겠느냐? 일제 강점기 때도 신사참배를 믿음으로 이겼으니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교회를 지키겠다”며 거부했다. 당시 원당교회 신자 14명, 해성교회 7명 등 21명과 근처 지경교회 소속 신자 9명이 공산당에 의해 순교했다.

보고서는 전남 신안의 문준경 전도사에 대해서는 “18세 시집을 갔으나 자식을 낳지 못하고 32살 때 남편이 새 아내를 맞이한 슬픔을 뒤로한 채 성결교회의 전도사가 돼 이후 신안군 소재 섬 곳곳에 교회를 개척했다”고 소개했다. 

보고서는 “공산당들이 문준경 전도사에게 씌운 죄목은 ‘새끼를 많이 깐 암탉’이었다”며 “그녀와 함께 처형된 교인들은 20여 명이었다. 신안 임자도에서 그녀가 개척한 교회 중 하나인 진리교회 등 교인 48명이 살해당했고, 특히 신안 임자도 주민 13,000명 가운데 21%인 2,700명이 한국전쟁 중 목숨을 잃었다”고 서술했다. 

보고서는 또한 두 여전도사와 함께 당시 평범한 기독교 신자들이 반공사상에 투철했던 이유에 대해 "대부분의 기독교인은 정치활동에 가담하지 않았지만, 기독교인들은 분명한 반공사상을 가졌다. 이들에게 공산주의는 무신론을 주장하는 유물론이다. 이런 생각은 거의 모든 기독교인이 받아들이고 있다"며 "이런 입장 때문에 한국 기독교는 좌익에게서 박해를 받은 것이다. 충남 병촌, 완주 동상, 신안 임자 등의 신자들을 보면 이들은 특별한 정치활동을 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난다. 그럼에도 이들은 집단학살을 당했다"고 전했다.

저작권자 © 자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