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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청산에 사느냐 묻길래, 웃으며 대답 않지만 마음은 느긋해. 복숭아꽃 물따라 아득히 흘러가는 곳, 또 다른 천지로되 세상이 아니로다"(問余何事棲碧山, 笑而不答心自閑. 桃花流水杳然去, 別有天地非人間). 이백의 명시 ‘산중문답’이다. 마지막 구절에서 보듯, ‘人間’이란 원래 ‘사람 사는 곳=세상’이지 ‘사람=개인으로서의 인간’은 아니었다. 불교용어로 널리 보급된 이래 천수백년간, 19세기 일본에서 ‘人間=사람’ 용법이 등장하기까지 줄곧 그렇게 쓰였다.

1세기경 중국에 불교가 전해진 이래 수백년에 걸쳐 여러 불경이 번역된다. 주로 산스크리트 어휘의 한자 번역어들이 자리잡는 게 고전중국어의 성장 과정이었다. 근대일본어와의 접촉이 한국·중국의 언어 근대화를 급진전시켰던 것과 마찬가지다. 문화·문명의 교류 및 전파가 ‘번역’을 매개로 이뤄졌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당시의 신조어 涅槃열반(nirvana) 刹那찰나(ksana) 阿修羅아수라(asura) 佛陀불타(Buddha) 등이 원어 발음을 본 딴 음역이라면, 人間(mamusya) 輪廻윤회(samsara) 空공(sunya) 色색(rupa) 法법(dharma) 같은 것은 의역 내지 기존 어휘의 불교적 재해석이었다.

수많은 한자어를 공유하는 나라들 가운데 오늘날 한국과 일본에서만 ‘人間(인간·ningen)’의 쓰임이 완벽히 일치한다. 현재 우리말 어휘 ‘인간’은 고전중국어나 불교용어가 아닌, 근대어로서의 ‘人間’인 것이다. 한 개인을 ‘사이의 존재’ ‘관계성’ ‘개인 속의 무수한 자아’로 파악하는 인식이 있어야 가능한 용법이다. 근대일본어와 본격 접촉하기 이전 한반도에서 ‘사람’을 뜻하는 ‘人間’의 용례는 아직 보고된 바 없다.

중국어에선 예나 지금이나 ‘人間’은 ‘세상’을 의미할 뿐이다. 20세기 들어 다수의 일제 한자어들이 중국어에 편입됐고 원래 있던 고전중국어 어휘의 함의·뉘앙스를 변화시키기도 했지만, 특이하게 ‘人間’은 지금까지 고전중국어의 쓰임 그대로다. 프랑스 식민지가 되면서 한자문화권에서 완전히 이탈한 베트남 역시 고급 어휘들의 어원이 대부분 한자인데, ‘人間’에서 온 상용어는 보이지 않는다.

한자 ‘人’의 원형인 갑골문을 보면, 두 손을 맞잡고 얼굴 앞으로 들어 올린 채 허리를 공손히 구부린 모양이다. 이런 자세를 ‘읍(揖)’이라 한다. 예의를 아는 존재, 그게 이 상형문자가 말하는 인간관이었다. 이후 약 2000년 세월을 거쳐 ‘삼국지연의’ 시대 배경인 3세기 경에 이르면, ‘사람 人’은 드디어 서로에게 기댄 두 개의 획으로 굳어진다. ‘혼자 살 수 없는’ 삶의 본질을 환기시켜주는 글자가 된 것이다. ‘人’의 새로운 이해는 오역이라기보다 창조적 재해석이었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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