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이어령 교수 “지성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두드리면 다 열어주셔”

지난 2일 오전 종로구 서울대학교 장례식장에서 고(故) 이어령 초대 문화부 장관의 발인이 엄수되고 있다. /연합
지난 2일 오전 종로구 서울대학교 장례식장에서 고(故) 이어령 초대 문화부 장관의 발인이 엄수되고 있다. /연합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외람되게 이야기하자면, 지금까지 세속적으로 편안하게 살던 것을 끊고 떨어지는 추락의 경험과 아픔이 없으면 주님을 함부로 말해서도 안 되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정말로 모두 끊어버리고, 모두 버려야 한다. 예수님은 제일 먼저 부모와 가정을 버리시고, 고향을 버리시고, 모든 가진 것을 버리시고, 마지막에는 생명까지 버리셨다. 우리는 구하려고만 하는데, 그분은 계속 버리셨다.”

지난 2월 26일 소천한 故 이어령 교수는 2007년 회심 후 외손자를 떠나보낸 후에 성경을 읽고 이와 같이 말했었다. 대한민국 최고 지성인이자 무신론자 중 한 사람이었던 그가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됐을 뿐 아니라, 영성에 대한 많은 글들을 써내자 대중들은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이 교수는 평소 “지성 없이 영성으로 가느냐, 지성이 있으면 영성으로 못 가느냐 하는 토론은 무의미하다. 자신이 문을 두드리지 않으면 하나님은 절대 열어주시지 않는다. 인간에게 자유를 주셨기 때문”이라며 “지성이라는 욕망이 두드리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안 열어주시는 것이지, 지성이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두드리면 다 열어주신다”고 말했었다.

그는 “너무나 절실히 고독이 왔을 때, 절대 나는 하나밖에 없다고 생각했을 때, 즉 영혼이 갈구할 때, 목마를 때, 수돗물이든 1급수든 2급수든 보통 물로는 채울 수 없는 갈증을 느낄 때 어디로 가는가”라며 “물론 그런 영혼의 아픔과 갈증이 교회에 간다고 해결되진 않는다. 하지만 식당에 갔을 때 만날 맛있는 음식, 입에 맞는 음식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배가 고프면 식당에 갈 수밖에”라고 했다.

2017년에 출간된 ‘의문은 지성을 낳고 믿음은 영성을 낳는다’라는 책에서 이어령 교수는 이러한 생각을 “영성을 얻기 위해 지성을 버려야 한다는 사람도 있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며 “지성은 깨달음으로 가는 사다리”라고 설명했다.

이 책에서 그는 “성경은 종교 이전에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시요 소설이요 드라마로 존재해 왔다. 또한 생생한 철학을 담은 생명의 책으로 존재해 왔다”며 “성경을 바이블이라고 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영어의 바이블은 그리스어로 ‘책’을 뜻하는 ‘비블로스(biblos)’에서 나왔다고 한다. 성스럽다(聖)거나 경전(經)이라는 뜻이 아닌, 그냥 책”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거기 담긴 것이 언어와 문화의 장벽을 넘어 역사의 골짜기를 넘어 모든 이의 손과 가슴에 가닿을 수 있기 때문”이라며 “하나의 암호처럼 생소한 아이콘으로 우리 앞에 가까이하기 어려운 경건함으로만 존재하던 그 책이, 기독교를 믿든 안 믿든 모든 사람들의 ‘책’으로, 아주 친근한 모습으로 다가오게 될 것”이라고 전했다.

그는 “신학이나 교리는 잘 몰라도 문학으로 읽는 성경, 생활로 읽는 성경이라면 제가 거들 수 있는 작은 몫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학적 레토릭과 상상력, 그리고 문화적 접근을 통해 빵과 밥과 떡 사이의 거리를 좁혀줄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며 “비유 뒤에 숨은 문화를 알고 그 차이를 극복해 땅끝까지 가면, 논밭에서 일하는 농부들의 후예들도 성경 속 유목민들이 건넜던 저 광야의 바람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성경의 언어들이 얼마나 아름답고 눈물겹고 황홀한지를 직접 느낄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시를 읽듯이 소설을 읽듯이 성경을 읽으면, 어렵던 말들이 나에게 더 가까이 다가올 것이다. 그래서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다같이 읽을 수 있는 성경, 우리가 쓰러졌다 일어서는 법과 미움을 넘어서는 사랑의 수사법과 등 돌린 사람을 포옹하는 너그러운 몸짓이 무엇인지 말할 수 있게 될 것”이라며 “내일의 식탁에는 우리의 배를 불리는 밥만이 아니라, 빵만이 아니라 우리의 눈과 마음까지 환하게 밝혀줄 참으로 눈부신 햇살이 가득 차게 될 것”이라고 했다.

이어령 교수는 2007년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된 이후, '지성에서 영성으로'를 시작으로 '의문은 지성을 낳고 믿음은 영성을 낳는다', '지성과 영성의 만남', '소설로 떠나는 영성순례', '딸에게 보내는 굿나잇 키스' 등을 펴냈으며, 최근 김지수 기자와의 인터뷰 등을 담은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과 삼성 故 이병철 회장이 만년에 가졌던 24가지 종교적 물음에 답하는 '메멘토 모리'도 출간했다.

1934년 충남 아산에서 출생한 고인은 문학평론가, 언론인, 교수 등으로 활동하며 한국 대표 석학이자 우리 시대 최고 지성으로 불렸다. 한국 문화와 접목한 창의력 넘치는 연출로 전 세계의 호평을 받은 1988년 서울올림픽 개·폐회식을 주관하기도 했다. 또한 노태우 정부 때 신설된 문화부 초대 장관(1990-1991)이었으며, 대한민국예술원 회원(문학평론)으로 활동했다. 2021년 한국문학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문화예술 발전 유공자로 선정돼 금관문화훈장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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