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당의자

장맛비 속에, 수성못 유원지 도로가에, 삼초식당 천막 안에, 흰 플라스틱 의자 하나 몇 날 며칠 그대로 앉아있다. 뼈만 남아 덜거덕거리던 소리도 비에 씻겼는지 없다. 부산하게 끌려 다니지 않으니, 앙상한 다리 네 개가 이제 또렷하게 보인다.


털도 없고 짖지도 않는 저 의자, 꼬리치며 펄쩍 뛰어오르거나 슬슬 기지도 않는 저 의자, 오히려 잠잠 백합 핀 것 같다. 오랜 충복을 부를 때처럼 마땅한 이름 하나 별도로 붙여주고 싶은 저 의자, 속을 다 파낸 걸까, 비 맞아도 일절 구시렁거리지 않는다.

상당기간 실로 모처럼 편안한, 등받이며 팔걸이가 있는 저 의자, 여름의 엉덩일까, 꽉 찬 먹구름이 무지근하게 내 마음을 자꾸 뭉게뭉게 뭉갠다. 생활이 그렇다. 나도 요즘 휴가에 대해 이런 저런 궁리 중이다. 이 몸 요가처럼 비틀어 날개를 펼쳐낸 저 의자,

젖어도 젖을 일 없는 전문가, 의자가 쉬고 있다.

문인수(1945~2021)

 

/게티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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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는 예술작품의 단골 소재다. 그만큼 상징하는 바가 다양하여 관찰과 사유의 대상이 된다. 편의점 파라솔 같은 곳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흰 플라스틱 간이의자는 가볍고 튼튼하다. 국민의자라 해도 손색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의자를 함부로 다룬다. 한꺼번에 열 개씩 스무 개씩 나르고 던지고 심지어 발로 차기도 한다. 값싼 대체재가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시인의 눈에 흰 플라스틱 의자 하나가 들어온다. 수명이 다해 공터에 버려졌고 처량하게 장맛비까지 맞고 있다. 자세히 보니 잘 아는 의자다. 생김새가 똑같아 분명하진 않지만, 자신의 몸무게를 지탱했던 의자였을 수도 있다.

수명을 다한 플라스틱 의자는 다름 아닌 시인 자신이라고 인식한다. 의자처럼 버림을 받았지만 원망하거나 비참하지 않다. 그런 감정 따위는 벌써 말끔히 정리되었다. 그래서 지금은 ‘속을 다 파낸’ 듯 배알도 없다. 그렇기에 ‘짖거나’ ‘꼬리치거나’ ‘슬슬 기거나’ ‘비 맞아도 일절 구시렁거릴’ 일이 없다. 시인은 오히려 버려진 의자가 편하게 여겨진다. 버림받은 게 아니라 ‘휴가’ 중이라 생각이 든 탓이다. 사람 몸무게를 받치는 따위의 일을 하지 않는 의자는 쉬는 중이고, ‘상당기간 실로 모처럼 등받이나 팔걸이가 편안하다.’

문인수 시인은 작년에 영원한 ‘휴가’를 떠났다. 마흔두 살에 시단에 나온 시인은 늦은 출발을 보상받기라도 하듯 꾸밈없는 시어를 쏟아내며 주목을 받았지만 파킨슨씨병을 이기지 못했다. ‘식당의자’는 제7회 미당문학상 수상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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