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근
박석근

대선으로 떠들썩하고 어수선한 와중에, 일반인들은 잘 모르고 지나칠 일이 일어났다.

지난 2월 21일,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17부는 한국작가회의 외 120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소송에서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냈다. 박근혜정부 시절 이른바 문화계 블랙리스트 명단에 오른 예술계 인사들에게 국가는 위자료 1천만원씩 배상하고, 실제로 피해를 입은 원고들에게는 3백만원을 더한 1300만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이었다.

재판부는 이에 앞서 창비 등 10개 출판사에 총 1억1000여만원을 배상하라 판결한 바 있다. 원고 측 출판사들은 박근혜 정부로부터 인격권, 사생활 비밀자유권, 양심과 표현의 자유가 침해되었다고 주장했다.

문재인 정권 초기 박영수 특검은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조윤선 전 청와대 정무수석 등에게 블랙리스트 명단 작성 및 지원 배제를 지시했다고 보고 이들을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 등 혐의로 재판에 넘겼다. 작년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파기환송 판결을 내렸고 현재 이 사건은 고등법원에서 다시 심리하고 있다.

한국작가회의 외 120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소송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부당하다. 현재 블랙리스트 관련 형사소송은 위에서 밝힌 대로 심리 중에 있다. 민사재판과 형사재판은 별개의 절차이긴 하지만 보통 형사판결이 민사판결에 영향을 미친다.

또 국가를 당사자로 하는 소송에서는 국가기관이 피고가 되는데, 애당초 문재인 지지 성명을 낸 원고와 피고는 한몸이다. 원고의 소 제기 시 예상했던 바와 같이 법무부와 문체부는 원고의 주장을 다투지 않았고 결국 패소했다. 여기에 한 술 더 떠 문체부장관은 판결을 기다렸다는 듯이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과 회복을 진전시키는 계기가 되길 바라고 앞으로 예술현장과 지속적으로 소통하면서 후속 사항을 이행하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는 이상한 성명을 냈다.

무엇보다 이 소송은 사실관계심리의 흠결이 크다. 민사소송은 형사재판과 달리 실체적 진실과 거리가 멀더라도 당사자가 사실관계를 다투지 않으면 일방의 주장은 그대로 인정된다. 국가 보조금을 신청하는 개인과 단체는 다수인 반면 보조금 수혜를 입는 개인과 단체는 소수이다. 선정은 각 분야별 전문가로 구성된 합의체 심사를 통해 이루어지는데, 개인의 경우 블라인드 심사가 원칙이다.

문재인 정부가 조사했다는 9473명에 이르는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는 지원 배제 블랙리스트가 아니라 정치적 성향이 적시된 문건으로 봐야 한다. 물론 이런 문건을 만든 공무원의 책임이 면제되는 건 아니다. 손해배상 책임이 인정되기 위해서는 가해 사실과 손해 발생 사이에 인과관계(因果關係)가 성립되어야 하는 바, 이 사건은 실체조차 불분명하다.

국가보조금 지급은 문체부 산하 위원회의 공모사업을 통한 합의제 심사로 결정된다. 만약 블랙리스트 예술인들이 실제로 불이익을 입었다면, 심사에 참여한 심사위원들과 공무원 간의 공모(共謀)와 실행이 있어야 한다.

법리가 이러한데 심리과정과 판결문 그 어디에도 공무원과 심사위원 간의 공모에 대한 언급이나 심리다툼은 찾아볼 수 없다. 결론적으로 문재인정부 하에서 한국작가회의 외 120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소송은 원고와 피고의 짬짜미, 즉 소송사기와 바를 바 없다. 정부는 항소를 포기했고, 국고낭비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

한국작가회의 외 120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소송은 낙선(落選)한 예술가들의 마구잡이식 분풀이에 다름아니다. 문재인정부는 지난 대선 때 지지성명에 대한 보답을 금전배상으로 한 셈이다. 이들은 선거가 있을 때마다 특정후보 지지성명을 냈고 이번 대선에도 예외 없었다.

다 차치하고, 지원을 고의로 배제하기 위해서는 앞서 말했듯 공무원과 심사위원들 간에 공모와 실행이 있어야 한다. 이것은 법리 이전에 상식의 영역이다. 사안이 이러한데 법무부, 문체부, 예술위원회, 그리고 당사자들은 입을 꾹 닫았다. 국가시스템이 고장 난 지 꽤 오래 된 듯하다.

저작권자 © 자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