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정부가 7일(현지시간) 한국을 ‘비우호국가’로 지정하고 자국 기업과 개인의 채무 등을 루블화로 상환할 수 있도록 하는 정부령을 발표했다. 루블화의 가치가 연초 대비 90%나 폭락한 상황에서 국내 수출기업들의 막대한 외화 환산 손실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연합
러시아 정부가 7일(현지시간) 한국을 ‘비우호국가’로 지정하고 자국 기업과 개인의 채무 등을 루블화로 상환할 수 있도록 하는 정부령을 발표했다. 루블화의 가치가 연초 대비 90%나 폭락한 상황에서 국내 수출기업들의 막대한 외화 환산 손실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연합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따른 서방국가들의 대(對)러 경제제재로 수출전선에 짙은 먹구름이 낀 가운데 8일 하루에만 호재와 악재가 이어지며 국내 기업들이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다.

우리나라가 미국의 러시아 제재 핵심인 ‘해외직접생산품규칙(FDPR)’ 적용 대상에서 면제됐다는 소식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도 전에 러시아가 한국을 포함한 친(親) 서방국가들을 비우호국으로 지정하며 ‘맞 제재’에 나선 것이다. 특히 러시아가 비우호국 채권자에게는 연일 가치가 폭락 중인 루블화로 대금을 지불키로 해 큰 피해가 우려된다.

8일 산업통상자원부는 미 상무부와의 공동성명을 통해 우리나라의 FDPR 면제 적용을 확정했다고 밝혔다. FDPR은 제3국에서 생산된 제품도 미국 기술과 소프트웨어가 쓰였다면 러시아 수출시 미 상무부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 역외 수출 통제다.

우리나라는 중립외교를 지향하며 서방의 러시아 제재에 미온적으로 대처하다 미 우방국 중 거의 유일하게 FDPR 적용 면제국에서 빠져 주요 산업의 수출에 타격이 예상돼왔다. 이에 기업들은 이번 FDPR 적용 제외로 유럽연합(EU)·일본·호주·캐나다 등 기존 면제국 32개국과 동등한 조건에서 러시아 수출이 가능해졌다며 일제히 환영했다. 하지만 기쁨을 누릴 여유는 없었다. 해소된 불확실성을 덮고도 남을 핵폭탄급 악재가 터졌기 때문이다.

7일(현지시간) 러시아 정부는 한국·미국·EU·일본 등 48개국을 ‘비우호국’으로 지정한다는 정부령을 발표했다. 또한 지난 5일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내린 ‘일부 외국 채권자에 대한 한시적 의무 이행 절차에 관한 대통령령’에 따라 러시아 기업과 개인은 비우호국 채권자에게 자국 통화인 루블화로 외화 채무(대금)를 상환할 수 있다고 선언했다. 러시아 제재 참여국들에 대한 맞 제재를 공식화한 것으로 풀이된다.

문제는 서방의 고강도 경제·금융 제재로 루블화의 가치가 날개 없는 추락을 이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외신들에 따르면 이날 현재 모스크바 외환거래소 기준 루블화 가치는 1달러당 155루블까지 폭락했다. 연초 1달러당 75루블에서 90%나 통화가치가 하락했다.

당장 러시아에 제품을 수출하고 있는 국내 기업들은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앞으로도 루블화의 가치 폭락 지속이 확실시되는 만큼 막대한 외화 환산 손실이 불가피한 탓이다. 러시아 현지에 진출해 있는 삼성전자·LG전자·현대자동차 등 국내 40여개 기업들의 처지는 더 심각하다.

현지 거래가 주로 루블화로 이뤄져 상당한 외화 환산 손실을 감수해야 하는 상황에서 달러로 받아야 할 수출 대금까지 루블화로 받게 되면 피해 규모가 눈덩이처럼 불어날 수 있다. 완성차 업계 관계자는 "자동차와 자동차 부품업계의 러시아 수출액이 연간 5조원에 달하고 있어 루블화 가치가 50%만 하락해도 엄청난 수익이 사라진다"면서 "비우호국 낙인으로 자동차 판매가 감소해도 걱정, 많이 팔려도 걱정"이라며 복잡한 심경을 토로했다.

조선업계 역시 손실 계산에 분주하다. 선박 건조 단계마다 일부 대금을 결제하는 형태로 계약이 이뤄지는 구조여서 루블화로 대금이 입금되면 손해를 피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한국조선해양 등 국내 빅3 조선사가 러시아에서 수주한 계약만 7조원이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기업들은 추가로 이어질 러시아의 비우호국 제재와 수위에 촉각을 곤두세우면서도 최악의 시나리오만은 현실화되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러시아의 디폴트(채무불이행) 선언이 바로 그것이다. 이 경우 기업들은 수출 대금을 떼이는 것은 물론 받아 놓은 루블화도 사실상 휴짓조각이 된다.

실제 국내외 경제 전문가들은 러시아의 달러 부족에 따른 디폴트 가능성을 지속 제기하고 있다. 무디스 등 세계 3대 국제신용평가기관은 이미 러시아의 신용등급을 ‘국가부도’ 직전까지 강등시켰다. 투자은행 JP모간은 러시아가 7억 달러(약 8600억원) 상당의 국채를 상환해야 할 이달 16일 디폴트를 선언할 수 있다는 관측을 내놓기도 했다.

재계 관계자는 "러시아의 이번 조치는 사실상 달러가 바닥나 디폴트 상황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방증으로 볼 수 있다"며 "러시아와 거래하는 국내 기업들의 피해가 최소화될 수 있도록 정부 차원의 선제적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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