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윤
이지윤

아니 땐 굴뚝에 피어나는 연기가 없듯이 정치적 성향 또한 갑작스럽게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처한 환경적 조건에 의해 생겨날 것이다. ‘나는 민주적 사회를 지지해서’ ‘이 사람은 별로라서’ 등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단어 사용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스탠스를 정당화하는 것은 그저 정해진 이념을 외치는 것처럼 보인다.

선거 시즌이 되어 여기저기서 각자의 목소리들로 시끌벅적하다. 내가 속한 대학 커뮤니티에서도 한 달 전부터 정치 이야기가 주를 이뤘다. 소위 명문대 집단에 속하는 학우들임에도 자신과 다른 정치 성향의 학우에게 다짜고짜 비난을 서슴지 않는다. 이는 진지한 사회적 이슈를 다룸에 있어서 적합한 태도가 아니다. ‘정의’라는 말이 붙으면 무조건 옳다고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정의라는 단어에 가슴이 웅장해지고 벅차오르기 전에, 정의의 개념에 대해 깊이 고민해 본 적이 있을까?

기본적으로 동의하는 사회적 의미의 ‘정의’는 정당한 분배에 초점을 맞춘 개념이다. 공정한 분배를 위해서는 각자에게 합당한 몫이 돌아가야 하고 이 합당함에 대한 생각은 개개인이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르다. 그렇기에 정의를 내걸고 이에 몰두하는 태도가, 각자 정의로움에 대한 생각이 다를 수 있다는 생각을 배제한 채 자신이 추구하는 합당함이 절대적으로 옳은 것임을 가정하고 있는 건 아닐지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즉, 정치는 자신의 상황적 조건에서 비롯된 이해관계의 추구임을 인지하고, 정치를 다룰 때 이념적이고 공상적인 단어를 쓰는 것은 가치관의 폐쇄성과 보수성을 드러낼 수 있기에 줄여야 한다.

사전투표와 관련해 부정선거 혹은 부실선거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지구 한편에서는 목숨을 걸고 민주주의를 획득하고자 싸우고 있는데, 우리는 이미 획득한 민주주의의 훼손을 그저 바라보기만 한다면 참 우스운 꼴이 아닐 수 없다. ‘정치와 법’ 교과서에서는 선거가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가르친다. 교과서에 부정선거가 실려 후대에 부끄러움을 남기지 않기 위해 저마다의 노력도 필요한 시점이다.

내가 대통령 선거에서 투표권을 행사했다는 것은 나의 이해관계를 독립적으로 추구할 나이에 도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부모님이, 교수님이 혹은 어떤 유튜버가 드러내는 정치적 견해에 휩싸이는 것이 아닌, 내가 내 이해관계를 파악하고 스스로 논리적으로 옳다고 여기는 방향으로 함께 나아가기 위한 첫 걸음을 내디딘 것이다. 새로운 대한민국의 일원이 되었음을 새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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