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춘근
이춘근

20세기는 인류 역사상 가장 처절한 전쟁의 세기였다. 그러나 1990년 소련이 붕괴되고 국제 공산주의가 거의 대부분 멸망한 후, 사람들은 낙관론에 빠져 있었다. 프란시스 후쿠야마 같은 학자는 자유주의에 대항할 이데올로기는 더이상 나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갈등과 충돌로 특징지워졌던 역사는 종언을 고했다고 선언했다.

공산주의 대국인 소련과 중국이 자본주의를 받아들인 이후의 세계는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화의 시대’(Age of Globalization)라고 명명됐다. 국가들이 국경을 개방하고 민주국가가 됐기 때문에 더 이상 구시대 민족주의 혹은 영토 등으로 인한 전쟁은 없을 것이라고 기대됐다.

다만 극히 소수파에 속하는 콜린 그레이 혹은 베어 브로묄러 교수 등은 21세기 역시 또 다른 ‘피의 세기’가 될 것이라고 외롭게 주장하고 있었다. 그들은 21세기에도 국제정치의 원칙과 강대국의 논리가 변한 바 없기 때문에, 언제라도 조건만 충족된다면 강대국들 사이의 전쟁도 가능할 것이라고 보았다.

지난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중에 타이완 해역에서도 중국의 침략 가능성이 고조되고 있었다. 만약 대만에서 전쟁이 발발한다면 그 전쟁은 미국과 일본이 참전할지도 모르는, 강대국 전쟁이 될 가능성조차 있다.

유럽과 미국은 말로는 우크라이나 편을 드는 것 같지만 러시아 침략을 사전에 막을 수 있는 실질적 조치들은 전혀 취하지 않고 있었다. 우크라이나 역시 세계화 시대의 헛된 망상에 빠져 전쟁 준비를 거의 하지 않고 있었다. 러시아 침공 위협을 경고받았을 때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오히려 ‘과장하지 말라’며 전쟁의 위험을 말하는 사람들을 꾸짖었다.

미국은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군과 교전을 벌이지 않을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침공을 오히려 부추긴 듯했다. 중국이 러시아에 동계올림픽이 끝난 후 전쟁을 개시하라고 요청했다는 뉴스까지 나왔다. 푸틴의 러시아 민족주의와 젤렌스키의 우크라이나 민족주의가 한판 붙고 있다. ‘우리 모두 함께’라는 세계화 시대의 구호는 포성(砲聲)에 완전히 가리워져 버렸다. 케이건의 말대로 세상은 다시 정글로 되돌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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