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랖 넓었던 윤석열 성장과정

초등학교 때 큰 덩치로 약한 친구들 버팀목 역할
축구·농구·야구 모두 좋아하는 ‘만능 스포츠맨’
서울대 법대 ‘5·18 유혈진압’ 모의재판 검사로
전두환에 사형 구형한 뒤 경찰 수배 피해 도피
사법시험 8전9기 합격...동료 챙기다 낙방 일화

어린시절의 윤석열.
어린시절의 윤석열.

윤석열 당선인에 대한 국민의 기대가 높은 만큼 그의 성장 과정도 궁금한 것 중 하나다. 윤 당선인은 알려진 바와 달리 인간적인 면모가 많은 사람이다. 어린 시절부터 어려운 친구들과 이웃들을 돕는데 인색하지 않아 ‘오지랖이 넓다’라는 욕 아닌 칭찬을 받아왔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무척 좋아한 윤 당선인은 성인이 돼서도 사람들 속에 묻혀 있었다.

윤 당선인은 1960년 12월 18일생이며 1남 1녀 중 장남이다. 서울 성북구에 위치한 대광초등학교를 다녔는데 어려서부터 유달리 키가 컸다. 덩치가 큰 그는 왜소한 체구로 따돌림을 받는 약한 친구들의 역성을 드는 버팀목 역할을 해온 것으로 유명하다.

어린시절의 윤석열.
어린시절의 윤석열.

그는 또 어린 시절 형편 어려운 친구들을 돕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초중고 친구들에 따르면, 윤 당선인은 체육을 즐겨 했다. 특히 그중에서도 축구를 좋아했는데 경기를 마치면 배고픈 친구들을 중국집에 데려가 짜장면을 사주곤 했다. 하지만 선행에 대한 내색은 절대 하지 않았다는게 학창시절 친구들의 증언이다.

그가 축구를 좋아했다는 것은 배 나온 지금의 윤 당선인의 모습에서 찾을 수 없는 의외의 면일지도 모른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동대문운동장에서 스케이트를 배우기도 했고 농구는 물론 야구 또한 잘했다. 전통적 야구 명문인 충암중학교로 전학을 갔을 때, 선수 제의도 받은 적도 있다. 이런 이유로 친구들은 그를 만능 스포츠맨으로 부르기도 했다.

윤석열의 대학졸업 사진.
윤석열의 대학졸업 사진.

윤 당선인은 대한민국이 정치·사회적으로 대격변의 시기를 맞던 1979년 서울대 법대에 입학하게 된다. 군부정권의 권력이 막강했던 시기 윤 당선인은 서울대 법대 ‘형사법학회’ 동아리에서 회원으로 활동한다. 당시 형사법학회는 서슬 퍼런 군부 정권의 폭압을 다룬 ‘5·18 민주화운동 유혈진압’에 대한 모의형사재판을 기획한다.

모의재판에서 검사를 맡았던 윤 당선인은 전두환 당시 대통령에게 사형을 구형한다. 그때는 사복경찰이 대학교 교정에서 불시 검문을 하거나 반정부적 성향의 학생들을 모두 정치범으로 간주하던 시기였다. 하지만 윤 당선인의 헌법적 기준은 냉철했다. 이후 ‘전두환 사형 구형’ 소문은 빠르게 퍼져 나가고 결국 윤 당선인은 경찰의 수배를 피해 외할머니가 계신 강릉으로 도피하게 된다. 이 일화는 윤 당선인이 정치에 입문하기 전부터 유명했던 사실이다.

윤석열의 대학시절 모습.
윤석열의 대학시절 모습.

윤 당선인은 대학시절 춤과 노래를 잘 했다고 한다. 덩치가 컸지만 그는 분위기 메이커로 학우들 속에서 유명했다. 당시 윤 당선인은 인기를 끌었던 ‘고고장’ 미팅도 주선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미팅에 참석한 동기는 거기에서 만난 여성과 결혼을 하는 등 윤 당선인의 활약은 동기들 속에서 하나의 잊지 못할 일화로 남았다. 이후 그는 고고장 미팅에서 결혼한 부부에게 매년 꽃바구니를 선물하는 등 친구들을 잘 챙기는 친구로도 알려졌다. 이후 늦장가를 가건 2012년 윤 당선인은 친구들의 축가 요청에 김건희 여사를 위해 간드러진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윤 당선인은 사람을 챙기는데 이유를 따지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방 출신의 한 대학 동기는 1990년 1차 사법고시 시험날 윤 당선인이 새벽에 찾아와 도시락을 주고 간 사연에 대해 이야기하며 잊을 수 없는 모습이었다고 말했다. "자기도 시험 준비하느라 바쁠 텐데,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그날 석열이의 마음 씀씀이는 평생 잊지 못하죠"라며 이야기 한 바 있다.

그는 대학 4학년 때 사법고시 1차 시험에 합격했다. 그러곤 2차 시험만 8번 봤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윤 당선인도 여러 가지 변명을 하지만 그 중 하나 소개할 만한 이야기가 있다. 그가 8번째 2차 시험을 앞두고 있던 당시 친구의 아내가 교통사고로 입원하자 맞벌이 부부로 아이를 볼 수 없었던 친구의 사정이 딱해 이틀 동안이나 아이들의 밥을 챙겨줬다는 것이다. 즉 그의 8전 9기는 오지랖으로 채워졌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이런 그의 인정은 외할머니와 모친 최성자씨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윤 당선인의 외할머니는 18세 때 강릉으로 시집와 19세에 남편을 잃었다. 홀로 자식을 키우기 위해 포목장사를 시작했다. 나중에 관동지방에서 알아주는 포목상으로 성장하고 부를 축적했으나 가난한 영재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며 나눔을 실천했다. 반세기 이상 관동지방에 선한 영향력을 끼친 외할머니 밑에서 자란 모친과 손자 윤 당선인의 뿌리가 다를 수 있을까 싶다. 

저작권자 © 자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