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창열
정창열

DJ정부에서 국정원장 등 요직을 두루 거친 임동원은 그의 회고록 〈피스 메이커〉에서 "화해-협력-변화-평화가 새로운 대북정책의 4가지 키워드였다. 이것은 북한이 조만간 붕괴할 것이라는 ‘붕괴 임박론’이 아니라 북한도 중국이나 베트남처럼 점진적으로 변화하게 될 것이라는 ‘점진적 변화론’에 토대를 둔 정책이다"라고 밝혔다.

DJ는 이런 상황 인식 아래 ‘햇볕정책’을 추진했고, 그 결과물의 하나로 분단 이후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을 개최하고 6.15 남북공동선언을 발표했다. 선언문 내용은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제 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 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는 것이다.

한편 문재인 대통령은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3주기(2012.8) 추모사에서 "남북국가연합 또는 낮은 단계의 연방제를 꼭 실현해 6.15선언에서 밝힌 통일의 길로 나아가고 싶다"라고 발언해 DJ의 대북정책 답습을 밝혔다. 실제 정권을 잡은 문 대통령은 김정은의 노골적인 대남 무시 정책에도 불구하고 집착에 가까운 ‘김정은바라기’ 정책으로 일관해 왔다.

문제는 진보정권의 대북정책이 ‘북한의 대남 위협 구조’에 대한 몰이해와 함께 ‘낮은 단계 연방제’안에 내재한 함정을 간과한 채, 막연한 낙관론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북한의 대남 위협 구조를 간략하게 살펴보면, 1) 김일성 이래 3대에 걸친 북한 세습 권력자의 무력 통일 의지가 대단히 확고하며, 2) 이를 실현하기 위해 4대 군사노선을 추진하는 한편, 국제사회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핵과 미사일 능력을 지속 강화하여 하시(何時)라도 대남 도발을 감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는 가운데, 3) 이른바 ‘결정적 시기’를 조성하기 위해 주한미군 철수·국가보안법 폐지 등 대남공작을 전개하는 상황이다. 요약하면 북한은 만반의 공격 준비를 하고 ‘동남풍’이 불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동남풍을 기원하며 쌓은 칠성단이 다름아닌 ‘낮은 단계 연방제’이다. ‘낮은 단계 연방제’는 표면적으로 기존의 연방제와 달리 선결 조건(주한미군 철수, 국보법 폐지, 공산 활동 합법화 등)을 제시하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이 때문에, 일부 안보론자까지도 ‘북한이 무력 통일 시도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기에 핵과 미사일을 지렛대로 하되, 통일의 2가지 행로 중 70% 가능성 안팎은 연방제적 통일을 추진할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하지만 ‘낮은 단계 연방제’에는 두 개의 함정이 있다. 하나는, 1민족·1국가체제에서 통일은 필연적으로 민족 내부 문제로 전환된다는 것이다. 이는 통일 문제에 외부 세력이 간섭할 여지가 없어진다는 것을 의미하며 더불어 주한미군의 존재 이유도 사라지게 된다. 또 하나는 연방제 통일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통일전선의 형성이 쉬워진다. 이렇게 되면, 한국 내 혁명 정세가 성숙해지고 북반부의 지원으로 ‘비평화적 통일’이 이뤄지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결론적으로 ‘낮은 단계 연방제’안은 DJ나 문재인 대통령의 기대와 달리, 평화적 통일 방안이 아니라 무력 통일을 위한 ‘미끼’일 뿐이다. 이런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연방제는 무조건 공산화 통일 방안이라는 인식이 우려스럽다."(정세현 전 통일부장관) 등 진보 인사들의 주장은 무민(誣民) 행위나 다름없다.

끝으로 사족 한 마디. 김정은이 핵·미사일 능력을 확대하는 것은 결코 북한 주민을 위해서가 아니며, 통일한국에 핵 능력을 넘겨주기 위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온 민족을 희생해서라도, 날조된 ‘백두혈통’만이 독재 권력을 이어나가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새로 출발할 윤석열 정부가 유념할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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