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의 감옥생활에 관해 미처 전하지 못한 이야기가 남아있다. 여러 가지 중 아래 이야기는 반드시 이번 기회에 독자들께 전해야겠다. 이승만의 ‘러시아’에 대한 평가 혹은 태도에 관한 문제다.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들에 대한 이승만의 평가를 유영익은 다음과 같은 네 단어로 알기 쉽게 정리했다. 멸청(蔑淸), 공로(恐露), 반일(反日), 친미(親美). 유영익의 책 『젊은 날의 이승만: 한성감옥 생활과 옥중잡기 연구』 (연세대 출판부, 2002) 144쪽부터 158쪽까지에 등장하는 내용이다.

‘멸청’이란 청나라를 개혁에 실패해 쇠약해진 노(老) 대국으로 보고 멸시하는 태도다. ‘공로’는 러시아를 강포하고 무도한 나라 그리고 영토 야욕에 사로잡힌 지도자를 가진 나라로 보며 공포의 대상으로 경계하는 태도다.

‘반일’은 일본에 반대하는 태도다. 이승만은 1904년 2월 8일 러일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일본에 우호적이었으나, 같은 달 28일 ‘한일의정서’를 체결하고 일본이 한반도에서 저지르는 난폭한 행동을 보며 입장을 바꿨다.

‘친미’는 이승만이 미국을 ‘상등(上等) 문명국’으로 평가하는 태도다. 배재학당 초기 미국 선교사들의 활동을 의심하기도 했으나, 옥중에서 개종하면서부터 미국은 이상적인 국가가 됐다.

유영익이 정리한 이승만의 주변 4 강국에 대한 평가는 논란의 소지가 있을 수 있다. 여기서는 ‘러시아’ 문제만 검토한다. 이승만의 ‘러시아에 대한 공포’는 어디에서부터 비롯되었나? 유영익은 그 근거를 이승만이 감옥에서 한문으로 필사한 ‘러시아 피터 대제의 고명’ (俄彼得大帝 顧命, 고명은 유언을 뜻한다) 이란 제목이 붙은 글에서 찾는다.

이승만은 감옥에서 40종의 잡다한 글들을 손 가는 대로 서양식 공책(노트북)에 필사해 두었는데, 유영익은 이 묶음을 ‘옥중잡기’ (獄中雜記) 라 이름 붙였다. 유영익은 2002년 책에서 ‘옥중잡기’ 전체를 정리하면서, ‘피터 대제의 고명’도 한글로 완역했다 (333-336쪽).

이승만의 ‘옥중잡기’ 표지에 등장하는 인물 워너 (Charles Dudley Warner, 1829~1900) 는 마크 트웨인 (Mark Twain) 과 동시대에 활동한 미국의 저명한 작가다. 인물 사진 밑의 ‘The Great Warner Library’ 라는 글귀는 물리적인 도서관이 아니라, 워너가 당시 선별하기 시작한 ‘세계문학선집’ (The Library of the World’s Best Literature) 을 뜻한다.

이승만이 필사한 ‘러시아 피터 대제의 고명’ 요지는 다음과 같다. "1725년에 대피득 (大彼得 Pyotr 1, 1682~1725) 이 재위 중에 서거하였다. 뒤를 이은 각 황제가 고명(顧命, 유언)을 상전(相傳)하여 버리지 않았다...1896년 겨울에 이르러 미국 대례상(大禮相, 미상) 보관인(報館人, 신문기자)이 진본(眞本) 14조를 찾아냈다.

1) 군비를 정제하고 무사를 경영하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요도이다...
2) 다른 나라에 싸움을 잘하는 장수가 있거나 학문이 깊은 학자가 있으면, 러시아는 반드시 예를 갖추어 초빙하여....
3) 유럽 각국에 분쟁이 있을 경우에 러시아는 반드시...그 가운데 끼어들어야 한다. 일이만(日耳曼, 게르만) 부족의 일에 있어서는 더욱 특별히 마음을 써야 한다...
4) 파란(波瀾, 폴란드) 국을 반드시 멸망시켜 파란의 인근 제국과 더불어 그 땅을 분할해야 한다...
5) 서전(瑞典, 스웨덴)은 반드시 쳐서 복종시켜야 한다. 그 계략은 먼저 서전과 단맥(丹麥, 덴마크)을 분할하여 둘로 만들고...
6) 러시아 황실의 자녀가 배필을 구할 경우에는 반드시 일이만(日耳曼, 게르만)의 열방(列邦) 군주 가운데서 고른다...
7) 통상을 논할진대, 러시아는 마땅히 영국과 연대하고 더불어 병행하여 서로 상충됨이 없도록 해야 한다...
8) 파라적해(波羅的海, 발틱해) 및 흑해(黑海)...[로 진출해야 한다].
9) 러시아는...제나박(돌궐 즉 터키의 수도 [Constantinople]) 전역에서 여유가 생기면 반드시 전력으로 인도(印度) 전체를 엿보아야 한다...
10) 오사마가(奧斯馬加, 오스트리아) 국은 오래도록 일이만(日耳曼) 전체의 주인이 되려고 하였다. 러시아는...일이만의 여러 제후들을 격동시켜 각자 시기하는 마음을 품게 하여...
11) 돌궐(突厥, 터키) 족속은 유럽에 속지를 가지고 있으니, 러시아는 반드시 그들을 핍박하여 쫓아내고...
12) 희랍교인(希臘敎人)으로 흉아리(匈牙利, 헝가리)에 있는 자, 돌궐에 있는 자, 파란에 있는 자들을 러시아는 음으로 도와야 한다...
13) 서전, 파사(波斯, 페르시아), 파란, 돌궐 제국이 전부 러시아에 복종하고 발틱해와 흑해가 서로 통하는 해로(海路)가 되어 러시아 선박이 그곳을 수호하게 되면...먼저 불란서(프랑스)를 향하여 천하를 공평하게 양분하자고 제의한다. 만일 불란서가 허락하지 않는다면 다시 오사리가(奧斯里加, 오스트리아)를 향하여 제의하고...
14) 불란서와 오사리가 두 나라가 만일 모두 러시아에 동의하지 않는다면...서로 싸우게 한다....먼저 일이만을 제압하고 다음으로 불란서를 친다. 오사리가와 불란서가 평정되면...구주(歐洲)의 사방 변경까지 모두 러시아를 대황제로 받들게 될 것이며..."

유영익 교수는 ‘옥중잡기’를 검토한 결과 이승만의 ‘공로증’은 그가 한성 감옥에서 ‘러시아 피터 대제의 고명’ (유언) 을 자기의 노트북에 베낄 때 이미 그의 뇌리에 인각되었다고 단언한다. "나중에 유명한 반공사상으로 바뀐 이승만의 반러사상의 원천"이 바로 이 글이라 확신한다 (유영익, 2002: 155-156).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현안이 된 요즈음 이승만이 백여 년 전에 주목한 ‘피터 대제의 유언’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이 문건은 1948년 진본이 존재하지 않는 위서로 판명났다 (Dimitry V. Lehovich, "The Testament of Peter the Great", American Slavic and East European Review, 7(2): 111-124, Apr, 1948).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건은 러시아가 팽창할 때마다 세인의 관심을 끌었다. 1차 동방전쟁 (Creamian War, 1853-56), 2차 동방전쟁 (Russo-Turkish War, 1877-78), 그리고 1차 세계대전 (1914-1918) 등이 그 예다. 러시아의 현대판 ‘짜르’(황제)라 불리는 푸틴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오늘날은 예외일까? 위 사진이 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