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어디 뻘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판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 듣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 부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너를 보면 눈부셔
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
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
나는 아무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
가까스로 두 팔 벌려 껴안아보는
너, 먼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이성부(1942~2012)

 

/게티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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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부 시인은 사회적 문제를 다루면서도 서정성을 놓지 않는다. 이 시 또한 그런 맥락에서 창작되었다. 봄을 의인화하여 먼데서 온갖 역경을 이기고 돌아오는 사람이다. 겨울은 ‘뻘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웅덩이’처럼 부정의 이미지로, 봄은 이런 곳들을 지나쳐 오는 희망이다.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온다’는 것은 필연이다. 그런데 막상 ‘너를 보면 눈부셔 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고 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 나는 아무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다는 것은 반어법으로 간절히 고대하는 것이 왔기 때문에 한순간 정신이 나가버렸다는 뜻이다. 반드시 오고야말 봄은 자유민주의 새로운 시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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