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사의 이단아들]레오나르도 다 빈치 "시간을 허비하고 말았다"
[예술사의 이단아들]레오나르도 다 빈치 "시간을 허비하고 말았다"
  • 박석근 문화 에디터
  • 승인 2018.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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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 빈치 자화상. 진위논란이 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자화상. 진위논란이 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는 1452년 이탈리아의 빈치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피렌체의 공증인(公證人) 세르 피에르의 사생아였다. 사생아는 좋은 직업을 가질 수 없었다. 의사도 약사도 될 수 없었고 대학진학도 불허되었다. 레오나르도는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열다섯 살이 되던 해, 레오나르도는 피렌체로 갔다. 그곳에서 아버지 세르 피에르는 어렸을 적부터 미술에 소질을 보이던 아들 레오나르도를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라는 화가의 공방에 견습생으로 들여보냈다. 만약 레오나르도가 적자였다면 아버지는 그를 공증인으로 만들거나 의과대학에 진학시켰을 것이다.

레오나르도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다. 사생아 출신이 가질 수 있는 직업 중에서 화가는 그나마 나은 직종이었다. 어린 레오나르도는 다른 견습생들과 마찬가지로 바닥 청소나 잔심부름 같은 허드렛일부터 시작했다. 붓을 닦고 안료를 빻는 일 등을 허드렛일을 하면서 그림을 어깨 너머로 배웠다.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의 '그리스도의 세례'. 레오나르도가 천사를 그려 넣었고 스승을 뛰어넘는 솜씨를 보여주었다.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의 '그리스도의 세례'. 레오나르도가 천사를 그려 넣었고 스승을 뛰어넘는 솜씨를 보여주었다.

그런 어느 날 레오나르도는 공방 스승의 작업을 직접 도울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스승 베로키오는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캔버스를 작업실 구석에 밀쳐두었다. 레오나르도는 스승에게 “제가 저 그림을 완성해도 될까요?” 하고 물었다. 스승은 마음대로 하라고 말한 뒤 공방을 떠났다. 레오나르도는 즉시 그리다 만 그림의 귀퉁이에 천사들을 그려 넣었다.

외출에서 돌아온 베로키오는 자신이 그리다 만 그림을 보았다. 레오나르도는 보이지 않고 그림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완성되어 있었다. 레오나르도는 빈 공간에 천사를 그려 넣었고 이로써 캔버스의 구도는 꽉 찼다.

“레오나르도, 레오나르도!”

베로키오는 그 솜씨를 믿을 수 없었다.

“예, 찾으셨습니까?”

“이 천사를 네가 그렸느냐?”

레오나르도는 일이 잘못되었나 싶어 기가 죽었다.

“네. 스승님이 그려도 괜찮다고 하셔서….”

레오나르도는 스승 베로키오의 회화를 뛰어넘는 솜씨를 보여주었다. 스승은 그것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내 앞에서 직접 그림을 그려 보거라.”

“뭘 그릴까요?”

“창밖에 보이는 풍경을 그려 보거라.”

피렌체
피렌체

레오나르도는 단숨에 창밖의 풍경을 그렸다. 베로키오는 어린 제자의 솜씨에 충격을 받았다. 그날 이후로 그는 그림을 그리지 않고 조각에만 전념했다. 그래서였을까, 훗날 레오나르도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스승을 능가하지 못하는 제자는 무능하다.”

공방 시절 레오나르도는 스승인 베로키오와 보티첼리를 비롯해 유명한 예술가들을 곁에서 지켜보았다. 레오나르도는 스승과 선생의 기법을 답습하다가 자신만의 방법을 개발해 나갔다.

레오나르도는 피렌체 화가 조합에 가입했고 스무 살이 되던 해인 1472년에는 정식 회원이 되었다. 드디어 자신의 공방을 운영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레오나르도는 실력을 더 키우기 위해 스승 베로키오의 조수로 남았다.

그 시절 레오나르도의 그림 실력은 누가 보더라도 최고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결점이 있었다. 주문받은 일감을 끝까지 완성시키지 않는 일이 잦았다. 처음으로 단독 주문을 받은 그림도 겨우 밑그림만 그린 채 포기했다. 제단화 <동방 박사의 경배> 또한 끝내 완성시키지 못했다.

이런 습관은 평생을 따라 다녔다. 그리하여 오늘날 레오나르도가 그린 게 분명하다고 판정된 그림은 스무 점을 넘지 않는다.

1472 ~ 1475년경에 제작된 수태고지(受胎告知).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베로키오 공방에 있을 때 그린 그림으로 추정.
1472 ~ 1475년경에 제작된 수태고지(受胎告知).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베로키오 공방에 있을 때 그린 그림으로 추정.

레오나르도의 그런 습관은 게을러서 그랬다기보다 그보다 더 관심을 끄는 분야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레오나르도는 그림보다 자연의 사물을 철학적으로 사색하는 데 몰두하였다. 천체의 운행을 연구하고, 풀과 나무, 암석의 특성을 조사했으며 새로운 학설들을 기록하곤 했다.

서른이 된 레오나르도는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밀라노는 피렌체 보다 큰 도시로 예술과 과학이 발달한 곳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스포르차 공작의 전속 화가이자 군사 기술자이자, 건축가로 일하며 17년 동안 머물렀다. 그 시절에 다양한 분야의 학자들과 교류하며 식물학, 광학, 수력학, 천문학, 해부학 등 온갖 분야에 대한 관심을 키워나갔다. 그는 웬만한 학자들보다 책을 더 많이 가지고 있었다.

밀라노
밀라노

레오나르도는 관찰력과 창의력을 바탕으로 운하를 설계하는가 하면 수력발전기를 고안했으며, 기중기, 다연발 총포 등을 고안했다. 또한 낙하산, 비행기, 헬리콥터, 전차, 잠수함, 증기기관, 온도계, 천체 운행도를 그리고 설계했다. 그 중에는 당시의 기술로도 충분히 만들 수 있는 것들도 있었지만, 실제로 만들어졌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레오나르도의 과학 스케치는 거울에 비춰보아야만 해독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좌우를 바꾸어 썼기 때문이었다. 왼손잡이였으므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써나가는 게 편했을 수도 있지만, 자신의 생각을 누군가가 가로챌까봐 그랬을 거라고 추정된다.

레오나르도는 사람과 동물의 해부도를 그렸다. 그것은 당시 의학에 종사하던 사람들이 그린 것보다 훨씬 더 세밀한 것이었다. 나이와 성별을 가리지 않고 30구 이상 시체를 해부했다. 시체를 냉동시킬 방법도 방부제도 없던 그 시절, 냄새를 참아가며 시체 각 부위를 관찰하고 그림을 그렸다.

레오나르도가 그린 임산부 뱃속 태아
레오나르도가 그린 임산부 뱃속 태아

레오나르도에게 예술행위란 과학적 인식의 실천이었다. 수학은 그의 예술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예술가들보다 수학자들과 더 자주 교류했다. 과학자들도 예술에서 영감을 얻었다. 1497년경에 나온 파치올리의 <신성한 비례에 관하여>는 예술가와 학자 사이의 긴밀한 공동작업의 성과물이었다.

그림 속 남자는 양팔을 수평으로 펼치고 있는데 정사각형에 꼭 들어맞는다. 다빈치는 고대의 인체비례론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실제 사람의 육체에 자들 대고 측정했고 그 결과를 그림으로 그리고 글로 적은 것이다. 이는 미술작품에 비례와 대칭 등 수학적 원리가 적용된다는 사실을 증명하려 했다.

인체비례도
인체비례도

사람을 원과 정사각형 안에 그려 넣은 이것은 레오나르도의 독창적 생각이 아니다. 고대 로마제국의 건축가인 마르쿠스 비트루비우스 폴리오가 처음 제시한 것이다. 그의 저서 ‘건축십서’에 이것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나와 있다.

‘몸의 중심은 배꼽이다. 사람을 눕혀 손발을 뻗게 한 뒤 컴퍼스 중심을 배꼽에 두고 원을 그렸을 때 손끝과 발끝이 원에 닿는다. 이런 방법으로 몸이 구현하는 정사각형을 찾을 수 있다. 발끝에서 정수리까지 길이를 재고 그 수를 뻗은 두 손끝과 비교하면, 자를 가지고 그린 정사각형처럼, 너비와 높이가 똑같다.’

르네상스 예술가들에게 인간의 육체를 이상적으로 구현하는 게 하나의 과제였다. 고대 로마의 비트루비우스의 이상적 육체론은 레오나르도에 이르러 정교한 과학으로 탈바꿈 되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화가란 미를 창조하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미란 처음에는 화가의 정신 안에 있고, 그 다음에는 화가의 손에 있다.”

레오나르도의 이러한 태도는, 예술의 근본이 플라톤이 말한 ‘자연 모방론’에 맞지 않는다. 그는 예술가란 사물의 창조자라 생각했다. 그러므로 회화는 신의 피조물을 재창조해내는 작업이었다. 레오나르도는 예술가는 창조주와 연결된 존재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예술은 자연에 대한 기계적 모사가 아니라 자연의 본질적 인식에 기초하여 과학을 동원한 섬세하고 정교한 창조적 작업이다.

모나리자. 1503~1506년경. 판화에 유채. 파리 루브르 미술관.
모나리자. 1503~1506년경. 판화에 유채. 파리 루브르 미술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명성을 천하에 알린 또 하나의 걸작은 <모나리자>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이전에 많은 화가들은 형태를 정확하고 분명하게 윤곽 지을수록 사물의 실재감도 살아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사물이나 인물의 윤곽선을 될수록 분명하게 그렸다. 그러나 그렇게 그려진 그림은 대상의 생명감을 빼앗았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는 경계가 선이 아닌 명암의 점진적 변화로 표현했다. 명암의 섬세한 변화가 선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레오나르도는 애초부터 선을 긋지 않고 명암의 미묘한 변화로 대상을 그렸다. 이것을 스푸마토 기법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의 신비한 얼굴의 비결은 바로 '스푸마토' 기법에 있다. '스푸마토'란 '연기처럼 사라지다'의 이탈리아어 'sfumare'에서 유래한 말이다.

최후의 만찬. 1495년 경. 산타마리아 델라 그라치에 성당. 템페라 벽화.
최후의 만찬. 1495년 경. 산타마리아 델라 그라치에 성당. 템페라 벽화.

레오나르도 다 빈치 이전에도 많은 화가들이 최후의 만찬을 그렸다. 그러나 그것들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그림과 근본적으로 달랐다. 최후의 만찬은 시선을 집중시키는 절묘한 수학적 구도가 바탕이 원근법과 인물의 내면을 표현하는 독특한 명암법이 특징이다. 로마 병사들에게 잡혀가야 할 운명의 예수를 가운데 두고, 제자 하나하나의 특징을 잘 살아나 있다.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성경의 추상적 내용이 비로소 구체적인 역사성을 띤다.

천재는 죽어가면서 이렇게 한탄했다.

-나는 내게 주어진 시간을 허비하고 말았다.

 

◇필자 박석근 작가는?
경남 마산에서 출생하여 중앙대학교에서 예술학 석사학위를 받았고 문학사상 신인상 수상으로 문단에 데뷔했다.
◇주요 저서
ㆍ장편소설 <외로운 사람들은 바다로 간다> 책세상
ㆍ장편소설 <숨비소리> 책세상
ㆍ창작집 <남자를 빌려드립니다> 민음사
ㆍ청소년지식소설 <수상한 화가들> 사계절 등

sgp@jay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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