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치-성장-분배··· 이승만은 '민주화 1세대'다
법치-성장-분배··· 이승만은 '민주화 1세대'다
  • 최성재
  • 승인 2018.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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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재 교육 문화 평론가]

이승만은 민주화 1세대로서 안으로는 우익 지주와 좌익 지식인의 극렬하고 집요한 반대를 물리치고, 밖으로는 6.25 기습남침에 맞서 한미동맹을 쟁취하여 자유민주주의를 정착시켰다. 더 나아가 의무교육과 토지개혁으로 전 세계 개도국 중에서 가장 평등한 국민국가를 건설했다.

제 발등 찍은 '김영삼의 포퓰리즘'

김영삼 정부의 '역사 바로 세우기' 살풀이에 의해 국립중앙박물관의 문화유산만 임시 창고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한국의 현대사도 박물관의 폐물 창고로 들어갔다. 그 이전의 정부는 무능과 혼란의 장면 정부 외에는 모조리 독재 정부로 매도되었다. 방송만 아니라 신문도 좌우를 가리지 않고 한국의 역대 정부에 대해 침을 뱉고 돌을 던졌다.

그때만 해도 상극이었던 <조선>과 <한겨레>도 정도의 차이만 있었을 뿐, 이승만의 친일독재와 박정희·전두환의 군사독재에 대해서는 북 치고 꽹과리 울리면서 준엄한 역사의 심판을 내렸다. 신문사의 데스크와 방송사의 스튜디오만 그런 게 아니었다.

대학의 캠퍼스도, 도회지의 다방도, 농촌의 마을회관도, 주택가의 안방도, 뒷골목의 술집도 구더기 쫓을 힘도 없거나 숟가락 하나 들 권력도 없어진 옛 독재자들을 성토하느라, 아니 마시고도 목마르지 않았고 아니 먹고도 배고프지 않았다.

군사독재의 본당과 문민민주의 영남갈래당과 옛 군사독재의 잔당, 이 세 정당의 합당으로 정권을 장악한 김영삼 정부로선 노태우 정부마저 군사독재라고 도매금으로 넘기기엔 조금 찜찜했는데, 전격적인 금융실명제 도입으로 의외의 정치적 수확물을 얻을 수 있었다.

그는 전직 두 대통령의 시커먼 통장을 통째로 서서히 시들해져 가던 여론재판의 불에 던졌다. 이때만 해도 좌파숙주 대통령은 제도란 괴물이 일종의 유기체로서 자체의 입과 머리와 팔다리가 있다는 것을 몰랐을지 모른다. 문민민주 대통령이 도입한 금융실명제가 배은망덕하게! 한 푼도 받지 않겠다고 언명해 놓고는 몰래 아들에게 맡겨둔 천문학적 정치자금을 권력 누수기에 때맞춰 폭로할 줄은 몰랐을 것이다.

출처 리얼팩트TV

선거 민주주의와 평등 민주주의

한국에서 민주주의는 크게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첫째는 선거 민주주의이고, 둘째는 평등 민주주의이다. 김영삼 정부 때는 이 중에서 선거 민주주의를 주로 얘기했다.

이승만은 간접이든 직접이든 선거에 의해 선출되긴 했으나 마지막에 만천하에 드러난 선거부정을 저질렀으므로 독재자로 매도되었고, 군 출신 세 대통령은 선거는 했으나 군사쿠데타로 일단 권력을 장악한 후에 은연중에 국민을 협박하거나 세뇌하여 당선되었다는 확신 하에 독재자로 매도되었다.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는 주로 평등 민주주의를 권력의 후광으로 삼았다. 평등 민주주의는 인민민주(공산주의)와 민중민주(사회주의)가 있다. 북한의 공산주의가 서슬 퍼렇게 살아있는 분단 현실에서 차마 공산주의는 내놓고 주장할 수 없으므로 그건 친정부 성향의 외곽단체에게 맡기고, 분배정의와 평등과 민족자주를 내세워 실질적으로 사회주의를 지향하여, 대한민국의 현대사는 끝없이 헐뜯고 북한의 현대사는 요식 행위로만 비판하고 북한의 '힘 있는' 동족을 으스러져라 끌어안는다.

그 아래 힘도 없고 입도 없는 2천만 노예는 허울 좋은 민족이란 말로 얼버무리고, 실지로 그들을 돕는 북한인권 문제가 나오면 먼 산을 쳐다보거나 북한인권 운동가를 수구꼴통 냉전적 사고에 찌든 자들이라고 집요하게 헐뜯었다.

자료사진 연합뉴스
자료사진 연합뉴스

형식 민주주의와 실질 민주주의

바로 이 선거 민주주의와 평등 민주주의란 두 개념에 치명적 오류가 있다. 선거 민주주의가 제도상의 민주주의라면 평등 민주주의는 이념상의 민주주의다. 그런데 제도상의 민주주의는 선거만 있는 게 아니고 선거도 절차상의 문제만 있는 게 아니다.

이승만의 30일 선거부정은 안 되고, 김영삼과 김대중의 30년 공천 장사는 괜찮은가. 박정희의 군사 쿠데타는 안 되고, 노무현의 국회 농성 쿠데타는 괜찮은가. 노태우의 6.29선언은 안 되고 광우병 난동 100일은 괜찮은가, 위대한가.

한미FTA는 당시 우파가 주장했듯이, 사소한 절차만 몇 개 놔둔 노무현도 이미 다 알고 있었음에 틀림없지만, 한국에게 월등히 유리한 것으로 판명이 나서, 10년 만에 미국의 으름장으로 결국 재협상으로 타결되지 않았나.

그 후 구제역(口蹄疫)으로 수십만 마리를 생매장한 한우의 낯 뜨거운 후진적 관리와 불결한 사육에서 보듯이, 미국 소(광우병 3마리)가 한우(겁이 나서 광우병 조사 자체를 못한)보다 훨씬 안전하다는 것이 여실히 입증되었지만, 광우병 촛불에 대해서 잘못을 인정한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는가. 사과는커녕 그때 선전선동의 최일선에 섰던 사람이 정권이 바뀌자마자 MBC 사장으로 발탁되지 않았는가. 정권의 나팔수로 금의환향하지 않았는가.

자료사진 연합뉴스
자료사진 연합뉴스

의무교육과 자유민주주의를 정착시킨 이승만

이념상의 민주주의도 국가의 근본을 흔드는 문제다. 이념 때문에 3백만의 동족을 잃은 적이 있는 한국으로선 자유민주 외에는 논의될 수가 없다. 구서독이 1956년 위헌심사결정으로 공산당(KPD)을 해체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보다 앞서 독일연방에선 1951년에 헌법재판소가 출범하자, 니더작센의 란트 자치정부에서 11%의 지지를 획득한 극우정당 사회주의제국당(SRP)도 자진 해체한 적이 있다. 극좌든 극우든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파괴하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민주가 뭔지, 자유가 뭔지, 빈부와 남녀 무관하게 국민이면 누구나 받아야 하는 의무교육이 뭔지, 공산주의가 뭔지, 평등이 뭔지, 3천만 국민 중에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열 손가락도 안 되던 때, 이걸 말 그대로 홀로, 고립무원(孤立無援), 수많은 기득권자 곧 우익 지주와 좌익 지식인과 싸우고 또 싸우면서 가르치고 정착시킨 나라의 아버지가 이승만이다. 세계 정치계의 거목 이승만이다.

법치를 확립한 우익 정부

민주주의에서 선거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법치의 확립이다. 이것이 언제부터 가능해졌는가. 1948년 7월 17일 헌법이 제정된 이후다. 그 이전 3년은 법보다 주한 미군의 문서였고 통역관의 말이었다.

한국에서 대부분의 법률이 완비된 것은 박정희의 국가재건최고회의에 의해서이다. 대한민국의 어떤 국회도 6개월 수명의 국가재건최고회의보다 생산적이었던 적이 없다. 지금도 대부분의 법률은 그때 제정된 법에 기초하고 있다. 그전에는 헌법만 있었을 뿐 법률이 거의 없어서 미군정의 영문(英文) 법률과 일제의 일문(日文) 법률에 의존하고 있었다.

1961년 국가재건최고회의
1961년 국가재건최고회의

법치를 확립하려면 법률만 있다고 되는 게 아니다. 무엇보다 국가안보가 튼실해야 하고, 그 다음으로 필수적으로 경찰의 공권력이 살아 있어야 한다. 이승만은 홀로 싸워, 담대하게 베팅해서 쟁취한 한미동맹으로 북한만이 아니라 소련과 중공도 감히 대한민국을 넘보지 못하게 만들었다. 덩달아 일본도 오금 지리게 만들었다.

또한 박정희는 자주국방계획과 실천으로 베트남의 적화통일로 한껏 꿈에 부풀던 김일성의 야욕을 원천적으로 분쇄했다. 안보의 둑은 오히려 김영삼 정부부터 곳곳에 구멍이 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북한은 핵으로 한국과 미국을 동시에 협박하기 시작하여 이제 당당히 6차 핵실험으로 핵보유국으로서 한국을 일개 위성국 내지 남조선 식민지 취급하며, 미국과 대등한 입장에서 협상하려고 한다.

이승만 정부를 엎어 버리고 등장한 장면 정부 때 한국의 치안 상황은 거의 무정부 상태였다. 자유를 파괴하는 자유가 독버섯처럼 자라났다. 조직과 권력과 돈 앞에서는 경찰이 속수무책이었다. 이런 상황을 일거에 정리한 정부가 박정희 정부다. 이렇게 제자리를 찾은 법의 파수꾼은 노태우 정부까지만 해도(범죄와의 전쟁) 세계적인 자랑이었다.

김영삼 정부부터 경찰은 불법폭력시위대에 서서히 밀리기 시작했다. 이젠 아예 대한민국의 경찰은 동네북이다. 이명박 정부 들어서 더 심해졌다.

그사이 법치는 망가질 대로 망가져서 떼법이 법률 위에 우뚝 섰고 여론법이 헌법 위에 군림하고 있다. 이게 민주주의인가. 선거 민주주의 200년을 자랑하는 중남미와 나을 게 뭔가.

이런 상황을 바로잡기 위해 통진당을 해산하고 민주노총의 폭력시위를 법정에 세운 박근혜는 도리어 떼법과 여론법에 의해 파면되었다.

골고루 가난한 북한 협동농장
골고루 가난한 북한 협동농장

자유와 평등의 주춧돌을 놓은 이승만

법치의 확립과 함께 경제성장과 공정분배가 뒤따라야 민주주의는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운다. 이승만은 분배가 성장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5천년 역사상 가장 큰 결단인 농지개혁을 단행했다.

협동농장으로 국가소작제를 도입한 북한과 중공과 소련이 생산성 저하와 분배 왜곡으로 극심한 고통을 당할 때, 이승만은 가난하지만 골고루 고통을 분담하는 국가를 건설했다. 이승만 정부는 평등 민주주의를 이념으로 하는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와 문재인 정부가 눈 먼 돈을 방방곡곡에 원님이 종이 꽃잎을 뿌리듯 마구 뿌렸거나 뿌리는 것(악순환 vicious circle)과는 하늘과 땅만큼 차이 나는 선순환(virtuous circle)적 효과를 거두었다.

경제성장은 박정희 정부에서 전두환 정부를 거쳐 노태우 정부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세계1위를 자랑하던 경제성장 시기에도 분배의 척도인 지니계수가 개도국 중에선 독보적이었고 서구 선진국에 비해서도 별로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 당시의 분배정의도 좌파정부보다 나으면 나았지 못하지 않았다.

이게 다 이승만의 인류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토지개혁에서 비롯되었다. 200만 농가가 200만 헥타르의 농지를 평균 1헥타르(1정보, 15마지기)씩(상한선 3헥타르) 사실상 거의 공짜로, 5년간의 소작료만 받고 나눠 갖게 만든, 영원히 소유하게 제도화한 이승만의 위대한 토지개혁에서 비롯되었다.

자유만이 아니라 평등도 세계에서 가장 모범적으로 정착시킨 지도자가 대한민국의 국부(國父) 이승만이다.

이승만의 이 평등 민주주의는 한국의 지식인들이 그렇게 부러워하는 인도의 네루가, 세습 계급 곧 카스트의 나라 인도의 3대에 걸친 족벌 민주주의자 원조가 족탈불급(足脫不及) 따라가지 못했던 위업이다.

이상에서 보았듯이, 이승만은 민주화 1세대, 박정희는 민주화 2세대, 노태우는 민주화 3세대, 박근혜는 민주화 4세대이다. 반면에 김영삼과 김대중은 포퓰리즘(populism) 1세대, 노무현은 포퓰리즘 2세대, 이명박은 포퓰리즘 3세대, 문재인은 포퓰리즘 4세대이다.

(2008. 8. 9.) (2018. 4. 2.)

csj@jay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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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마루 2018-04-15 22:06:43
초대 대통령 이승만을 '국부'로 모시지는 못할 망정 제주 4.3사건 같은 공안사건의 역사적 의미를 왜곡해 이승만의 업적을 폄훼하는 게 현실입니다. 무기를 먼저 들고 난동을 일으킨 남로당의 쿠데타 행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있었던 민간인의 피해를 부각시켜 독재정권의 치명적인 과오로 몰아가는 좌파정권의 반역사 행위를 더이상 보고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연좌제가 일반화되어 있던 당시의 상황에서 공산주의자들이었던 남로당원들의 가족들이 함께 산속으로 숨어들 수 밖에 없었고 당연히 민간인 희생자들이 다수 나올 수 밖에 없었지요. 이를 분단의 비극으로 보아야지, 이승만 정권의 과실로 몰아가며 억지 평가하는 것은 정말 어이가 없습니다. 빨리 통일을 이루어 좌파세력 척결이 시급한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