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 집단광기' 업은 칼춤··· 권위 없는 권력의 시대
'촛불 집단광기' 업은 칼춤··· 권위 없는 권력의 시대
  • 최성재
  • 승인 2018.04.04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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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論/최성재 교육 문화 평론가] 

[친위 조직의 박수와 댓글과 환호에 용기백배하여 권력이 법의 육모방망이를 방자하게 휘두르면, 자유민주는 껍데기만 남는다.]

일반 상식과는 달리, 권위와 권력은 정반대편에 있다. 권위는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자발적 민심이고, 권력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강제력이다. 윗사람이 자기 의지를 아랫사람에게 관철시킬 수 있는 강제력이다. 권력이 권위를 잃으면, 상하 간에 불신의 골이 깊어지고 증오의 칼이 벼려진다.

이처럼 권위 없는 권력은 권위주의라고 불린다. 재미있게도, 권위와 권위주의는 정반대다.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것이지만, 권위는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다르다. 중동의 이슬람 국가에서는 여전히 코란이 법률보다 위에 있기 때문에, 민심은 세속의 권력자보다 종교 지도자나 족장을 높이 떠받든다. 따라서 세속의 권력이 종교의 권위와 충돌하면, 이슬람 신자는 기꺼이 후자를 따른다. 케말 파샤에 의해 정교가 분리된 터키에서조차 과거로 회귀하려는 코란 세력이 광범위한 지지를 얻는다.

조선시대의 유교적 권위와 대한민국의 민주적 권위는 사뭇 다르다. 그러나 권력은 조선시대 왕과 대한민국 대통령의 차이가 그렇게 크지 않다. 민주잣대(polity Ⅳ)에 따르면, 조선시대는 평균 +1으로서 왕조로서는 상당히 권력이 분산되어 있었다. 프랑스의 드골이 +5였고, 박정희의 3공화국이 +3이었다. 북한은 가장 좋았을 때가 –7이었고(중국은 1978년 이후 줄곧 –7), 1967년 –9로 떨어지더니 1995년부터 줄곧 –10을 유지하고 있다.

한국은 2012년부터 +9를 유지하고 있다. 경제에 이어 정치도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완전한 민주(full democracy +10)에 어떤 나라보다 단시일에 근접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이 현재 심각하게 도전받고 있다. 권력은 분산되어 있으나 분산된 권력이 스스로 권위를 잃고 있기 때문이다. 법을 빙자하여, 초법적(超法的) 시위대의 협박에 굴복하여 권력의 육모방망이를 조폭처럼 마구잡이로 휘두르고 있기 때문이다.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가 간파했듯이, 왕정이라고 해서 같은 왕정이 아니고 민주라고 해서 같은 민주가 아니다. 세종대왕과 연산군이 같은 왕이 아니듯이, 현군(賢君, king)과 폭군(暴君, tyrant)으로 선명히 갈라지듯이, 선거로 선출되었다고 해서, 정통성이 있다고 해서, 대통령이나 총리가 같은 대통령이나 총리가 아니다. 똑같이 선거로 선출되었고 똑같이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을 희생시켰지만(숫자에서 엄청난 차이가 나긴 하지만), 링컨과 히틀러는 천사와 악마만큼 다르다.

집단 광기가 만들어낸 권력은 '거짓 권력'이다

시대와 국경을 초월하여, 링컨은 권위를 얻었지만 히틀러는 권위를 잃었다. 그렇다면 권위도 보편적 잣대로 계량화할 수 있을 것이다. 당대에 사람들이 마음 깊숙한 곳으로부터 아무리 열렬히 지지했더라도 그것이 집단광기에 의한 것이라면, 거짓 권위에 지나지 않는다.

전후에 헛소리를 했지만, 하이데거도 히틀러에 아부하고 학문의 권력을 차지한 자다(≪히틀러의 철학자≫, 이본 셰라트). 당대의 지성인들이 곡학아세에 앞장서서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일반인을 대중매체로 세뇌하면 대명천지 민주 국가에서도 얼마든지 거짓 권위가 횡행하게 되고, 권력은 그에 빌붙어 방자해지고 민주는 형해화(形骸化)된다.

양극단에 위치한 우익 전체주의 파시즘과 좌익 전체주의 공산주의는 난형난제이지만, 평가는 상당히 엇갈린다. 전자는 전 세계에서 확실하게 단죄 받았고 지금도 여전히 악의 상징으로 지속적으로 상기되고 있지만, 후자는 두루뭉술하게 넘어가 비판에서 사실상 자유롭다.

특히 오늘날 polity Ⅳ에서 +10을 자랑하는 나라들에서, 개인의 자유가 철저히 보장된 곳에서 그 자유를 방패삼아 부자(금수저 좌파는 아무리 호사스럽게 살지라도 정작 본인은 거기서 쏙 빼고, 촘스키나 백낙청 같은 자)에 대한 증오에 기초한 상상 속 평등을 사회주의 천년왕국의 헌법 제1조로 삼는 사상이 횡행하면서, 서구 지성인들이 스탈린과 모택동을 히틀러와 무솔리니와 동급으로 취급하길 애써 피하기 때문이다.

스탈린은 그저 러시아 제국의 차르 정도로, 모택동은 중국 통일 왕조의 황제 정도로 얼렁뚱땅 넘어간다.

곳곳에 교두보 쌓은 386 주사파가 세상을 뒤집어

한국에서는 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386운동권으로 대표되는 주사파(NL)가 김영삼 정부에서 교두보를 마련하고 김대중 정부에서 곳곳에 진지를 구축하고 노무현 정부에서 크고 작은 성(城)을 모조리 장악하면서, 아래로 시민단체와 학계, 문화계, 언론, 노조에서 위로 정부와 국회, 법조계에 이르기까지 노른자위 권력을 거의 장악하면서, 사실상 권력을 독차지하면서, 세상이, 세상의 판단기준이 완전히 뒤집어졌다.

1980년대 대학생의 의식화 작업을 초등학생 나아가 일반인까지 넓히면서 ‘내로남불’ 친일과 ‘내로남불’ 독재 단 두 단어로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원초적으로 부정하고, 뜬금없는 반일(反日)과 반제국주의(反帝國主義) 단 두 단어로 소련군 대위 집단(북한)의 정통성을 은연중에 긍정하게 만듦으로써, 이제 권위는 구체적 자유민주와 구체적 법치, 구체적 북한인권과 합법적 태극기가 아니라 추상적 민족과 추상적 통일, 추상적 평화와 초법적 촛불에서 나오게 되었다.

이런 추상적이고 주관적이고 선정적인 명분은 김일성 공산왕조에게 6.25남침(조국해방전쟁)의 원죄와 인권유린(내재적 접근)의 범죄에 대해 면죄부를 안겨 주기에 이르렀다. 자연히 이름만 우익이었던 이명박 정부는 말할 것도 없고 비정상화를 정상화하려던 박근혜 정부와 당시 여당에서도 서슬 퍼런 좌파의 권위주의에서 자유로운 인물은 찾기 어려워졌다. 내부의 적이 더 무서워졌다. 그 결과가 국사 국정교과서 5565대 1이고,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소추와 파면이다.

연평해전과 장갑차 교통사고는 거의 동시에 일어난 불행이었지만 끼친 영향은 정반대였다. 연평해전은 두 좌파 대통령 이하 정부의 고위 관계자는 철저히 외면했다. 반공반북(反共反北)의 횃불을 단 한 개라도 피우기는커녕 유가족만이 쓸쓸히 피눈물을 흘리는 관계자 외 출입 금지 구역으로 무언중에 선포되어 삼엄하게 경계가 강화되었다. 일제 총독부가 독립투사 가족을 감시하고 연금했듯이! 반면에 교통사고 희생자 효순과 미선은 여론의 촛불로 국민의 가슴에 반미(反美)ㆍ친노(親盧)의 불꽃을 활활 피웠다. 북한에서도 두 소녀는 민족의 열사로 추모되었다.

천안함 폭침과 세월호 해상 사고도 마찬가지였다. 전자는 국제 공조의 ‘1호’ 물증에도 불구하고 북한과 하등 관련이 없다고, 심지어 미군의 자작극이라고 음모설을 퍼뜨리거나 단순한 좌초 사고니까 하루 빨리 잊자고 10분의 1, 100분의 1로 축소되었다.

후자는 선장이나 선주, 그리고 일선 관계자가 아니라, 인천시장이나 전남도지사, 진도군수가 아니라 모든 게 천 리 밖 대통령 책임이라고, ‘전지전능한’ 대통령이 신통력으로 즉각 감지하지 않고 축지법으로 날아가지 않고 구중궁궐에서 7시간 동안 죽치고 앉아 내버려두어서 그랬다고 백 배 천 배 과장되었다.

천안함은 사고였으니 하루 빨리 잊읍시다요?

하루도 빠짐없이 조난자에겐 끝없이 동정심을 짜내고(부모상도 대개 삼우제로 끝내건만), 선장과 선원이 도망가는 와중에 해경과 의인들이 목숨을 걸고 172명을 구조한 것은 빈말로도 감사하거나 치하하지 않고, 도리어 해경 관계자를 모조리 법정에 세우고, 304명의 희생자를 끝없이 추모하며 오로지 천 리 밖 대통령에게만 증오심을 부채질했다.

반면에 김영삼 정부와 김대중 정부에서도 그와 유사한 해상사고(1993년 서해페리호 292명 희생, 70명 구조)나 육상사고(2003년 대구지하철 참사 214명 희생)가 발생했지만, 그들과 한편인 문화권력과 사회권력은 그것을 당시 대통령과 5천만분의 1도 연관시키지 않았다. 촛불을 든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오로지 평소 꼴도 보기 싫었던 박근혜에 대해서만, 덮어씌우기 물귀신 작전으로 해상사고를 정치 문제화하여 자기 자식이 바로 어제 사갈 같은 박근혜의 음모로 생죽음을 당한 듯 지금까지 날이면 날마다 밤이면 밤마다 치를 떨고 있다.

권위도 보편적 기준이 있다. 진실, 사실, 인권, 생명, 공감, 법치, 물증, 교차 검증이 바로 그것이다. 거짓, 허구, 고문, 죽음, 증오, 인치(人治), 심증, 일방적 진술에 바탕을 둔 권력 행사는 거짓 권위의 사상누각에 지나지 않는다. 아무리 세뇌된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양심에 우러나서 찬양하더라도 그것은 거짓 권위에 지나지 않는다.

권력이 거짓 권위에 편승하여 철두철미 이중 잣대로 자기편에겐 묵비권을 무한 보장하면서 무죄추정(presumed innocence)의 원칙을 최대한 적용하고, 반대편에겐 서릿발 정의의 이름으로 다짜고짜 오랏줄을 채워 입에 재갈을 물리고 포토라인에 세운 후 일단 구속부터 시키고 온 나라에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면, 이에 항의하는 사람들은 설령 촛불의 열 배가 되어도 경찰의 옷깃만 스쳐도 공무방해죄로 잡아가면, TV가 그렇게 잡혀가는 사람에게만 앵글을 맞추면, 권력은 우물 안에서만 권위가 있지, 한 걸음 우물 밖만 벗어나도 도무지 권위가 서지 않는다.

댓글 부대들이 아무리 자발적 무한 리트윗으로 수구꼴통(정통우파) 죽여라, 70% 여론 지지로 권력을 덩실덩실 춤추게 하더라도, 그것은 짜고 치는 고스톱의 권위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민주화 수준이 -10인 북한과 하등 다를 게 없는 또 다른 독재다. 당당히 선거로 선출된 나치는 그렇게 탄생되었던 것이다. (2017. 3. 28.) (2018. 4. 2.)

csj@jay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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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에스더 2018-04-04 03:34:36
전능자의 완벽한 칼날이 반드시 처리하시리라
인간이 악하면 그렇게까지 ~~

아마의 화신들이 많군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