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우석
조우석

정치는 곧 말이다. 그래서 정치는 피 흘리지 않은 채 말로 하는 전쟁이라고들 하지만, 특히 그중 최고의 정치 행위는 대중연설이다. 그 사례가 미국 링컨 대통령의 위대한 게티스버그 연설(1863년)이고, 2년 뒤 2차 대통령 취임사가 아니던가? "피, 수고, 눈물 그리고 땀"을 요구했던 영국 처칠의 첫 총리 연설(1940년)도 빼놓을 수 없는데, 그런 원론을 새삼 환기시켜준 연세대 함재봉 교수의 <정치란 무엇인가?>는 국내 정치 수준을 끌어올릴 단행본이다. 문제는 우리다. 한국인은 이 소중한 언어를 좀처럼 신뢰하지 않는다.

"말 많은 사람"이란 표현이나 "입만 살았다" 등도 부정적인 뉘앙스가 아니던가? 게다가 역대 대통령 취임사에도 뒤탈이 적지 않다. 대표적 사례가 김영삼의 "어떤 동맹국도 민족보다 나을 수는 없다"는 대목이다. 그 취임사를 다시 읽어보라. 원 세상, 꼭 우리민족끼리 선언문으로 들린다. 노무현의 "반칙과 특권이 용납되는 시대는 끝나야 한다"도 계속 논란거리다. 잇달아 등장하는 "대한민국 현대사가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가 득세해온 역사"란 대목 때문이다. 즉 말이 독이 된 케이스가 그것이다.

요 며칠 세상은 대통령 집무실을 문제로 시끌벅적하지만, 그 못지 않게 중요한 문제가 윤석열 당선인의 대통령 취임사다. 5월 10일 취임식의 백미는 뭐니뭐니해도 취임사이고, 새 정부의 국정 철학을 압축한다. 문제는 한신대 윤평중 명예교수가 취임사를 감수한다고 들었는데 그게 내내 개운치 않다. 왜? 그는 조중동 중의 한 곳에 10년을 훌쩍 넘게 기명 칼럼을 써오지만, 사상적 정체성으론 엄연히 중도좌파로 분류된다. 5년 전 박근혜 대통령 탄핵 무렵인 2016년엔 열렬한 촛불 찬양의 글을 쓰기도 했다.

당시 그는 "촛불은 21세기 시민정치의 불꽃"이라고 했고, "찬란한 공화정의 새벽이 밝아오고 있다"며 흥분하던 걸 나는 내내 잊을 수 없다. 결정적으로 그는 한국사회 좌경화의 원조인 ‘사상의 은사’ 리영희 옹호론자다. 그가 썼던 책 <극단의 시대에 중심 잡기-지식인과 실천>(2008년)이 온통 그런 얘기로 가득하다. 그런 그에게 어떻게 자유우파의 철학을 담은 명문(名文)을 기대할까? 누군 말할 것이다. 그에게 취임사를 부탁하는 건 국민통합과 협치 때문이라고 애써 강변을 한다면 나는 뭐 할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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