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발 없는 '오슬로 합의'··· '팔-이' 평화는 아직 멀다
약발 없는 '오슬로 합의'··· '팔-이' 평화는 아직 멀다
  • 최영재 기자
  • 승인 2018.04.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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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사를 공부하는 가장 중요한 목적 가운데 하나는 현재의 국제관계를 이해하는데 참고로 삼기 위함이다. 현재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질서에서 한국인이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이 유대인과 이스라엘에 대한 역사이다. 미국의 국제정치를 주도하는 그룹이 바로 유대그룹이기 때문이다. 미국이 북핵 문제를 다루는 기본시각은 이스라엘의 국익에서 출발한다. 이스라엘의 적국인 시리아와 이란에 미사일 등 대량파괴무기를 수출하는 나라가 북한이기 때문에 북한 위협을 제거해야 하는 것이 미국의 대북정책 골간이다. 이런 차원에서 유대인이 정착해 나라를 만든 팔레스타인 지역에 대한 역사를 연재한다. <편집자주>

2015년 8월 22일(현지시간) 팔레스타인 라말라에서 열린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집행위원회 회의를 주재하고 있는 마무드 아바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가운데). 아바스는 이 회의를 끝으로 자리에서 물러났다.
2015년 8월 22일(현지시간) 팔레스타인 라말라에서 열린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집행위원회 회의를 주재하고 있는 마무드 압바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가운데). 압바스는 이 회의를 끝으로 자리에서 물러났다.
오슬로 합의에도 끝나지 않는 팔레스타인 자치구 분쟁

이스라엘정부와 팔레스타인 세력인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는 긴 투쟁 끝에 1993년에 오슬로합의를 맺고 1994년부터 팔레스타인의 일부에 PLO가 주도하는 자치가 개시되었다. 그러나 오슬로합의에서 결정된 팔레스타인문제의 포괄적 해결을 위한 대화는 좌절되었다. 더욱이 이스라엘과의 평화에 합의하지 않는 비PLO계 조직이 테러나 군사행동을 계속했다. 2000년 이후 다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간에 게릴라전이 재연됐다. 평화교섭은 사실상 정지상태다.

1993년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의 중재로 악수를 나누고 있는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왼쪽)와 야세르 아라파트 PLO의장. 그러나 두 나라 사이는 현재까지도 평화는 멀고 폭력은 가까운 영원한 앙숙이다.
1993년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의 중재로 악수를 나누고 있는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왼쪽)와 야세르 아라파트 PLO의장. 그러나 두 나라 사이는 현재까지도 평화는 멀고 폭력은 가까운 영원한 앙숙이다.

2005년 '이-팔 폭력중단 합의' 이후도 끝임없는 충돌

인이스라엘의 땅이
과거 자신들의 땅
이었음을 웅변하는
PLO문장.

아라파트 사후 후계자가 된 압바스는 2005년 2월 8일, 2000년 10월 이래 4년 4개월만에 이스라엘 샤론총리와 정상회담에 응했다. 양측의 폭력정지(정전)가 합의되었지만 교섭이 다시 시작되려면 정전이 이뤄져야 한다. 그러나 현재도 쌍방 공격이 완전히 끝나지 않아 어려움이 예상된다.

팔레스타인자치구는 요르단에 이웃한 요르단강 서안지구와 이집트에 접한 가자지구로 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자치지구다. 그 행정은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가 모체가 되어 설립되었던 팔레스타인자치정부가 행한다. 다만 최종적인 지위는 장차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과의 간에 맺을 포괄적 평화조약으로 결정할 예정이다. 현재 정식 지위는 잠정자치구・잠정자치정부로 되어있다.

용베르크 전투 전 후의 이집트-이스라엘-시리아의 영토 변화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의 영토 변화

팔레스타인 자치구의 인구는 약 330만명이다. 서안지구가 3분의 2, 가자지구가 3분의 1을 차지한다. 이는 900만명이 넘는 팔레스타인 전 인구의 3분의 1에 해당한다. 자치정부는 1995년의 잠정자치 확대합의에 근거하여 1996년에 실시한 입법평의회선거로 정식 발족했다.

팔레스타인 투쟁의 지휘자인 야세르 아라파트가 포병 진지를 시찰하고 있다. 평화협정으로 노벨평화상을 받았지만 말년에는 추문에 시달렸다.
팔레스타인 투쟁의 지휘자인 야세르 아라파트가 포병 진지를 시찰하고 있다. 평화협정으로 노벨평화상을 받았지만 말년에는 추문에 시달렸다.

팔레스타인 자치구는 이스라엘 건국 직전인 1947년에 열렸던 UN총회결의 181호(팔레스타인분할결정)가 정한 팔레스타인을 유대인, 아랍인, UN총괄지 등 3부분으로 분할한 결정을 기초로 했다. 이 결의는 여기에 반대하는 주변의 요르단과 이집트가 제1차 중동전쟁으로 요르단강 서안 지구와 가자지구를 점령했기 때문에 팔레스타인계 아랍 사람에게는 한뼘의 땅도 남지않게 되었다. 결국 유대인이 만든 이스라엘국가만 건설되었다.

이스라엘 공군이 제 1, 2차 중동 전쟁에서 주력으로 사용한 A30 스카이호크. 이집트 탱크 킬러로 불렸다.
이스라엘 공군이 제 1, 2차 중동
전쟁에서 주력으로 사용한 A30
스카이호크. 이집트 탱크 킬러로
불렸다.

땅 한 뼘 없었던 팔레스타인, 이집트 지원으로 '망명 정부' 발족

그 후 서안지구와 가자지구는 이스라엘이 점령했다. 하지만 1964년에 이집트 나세르 대통령의 후원으로 서안지구와 가자지구의 아랍계 주민과 팔레스타인난민의 통합저항조직으로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가 조직되어 사실상 팔레스타인망명정부가 되었다.

당초 팔레스타인해방기구는 이스라엘국가를 타도하고 팔레스타인땅에 무슬림・그리스도교도・유대교도가 공존하는

6일 전쟁에서 제공권을 장악한 이스라엘 공군의 폭격에 처참히 부서진 이집트군의 차량들이 사막에 널려있다.
6일 전쟁에서 제공권을 장악한
이스라엘 공군의 폭격에 처참
히 부서진 이집트군의 차량들이
사막에 널려있다.

비종파적인 민주국가를 수립하는 게 목표였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에 벌어진 이스라엘에 대한 대규모 저항운동(intifada, 인티파다)중에 현실주의 노선으로 전환했다. 그래서 요르단에 서안지구 포기를 선언시켰다. 이후 서안지구와 가자지구을 중심으로 팔레스타인 독립국가를 세워 이스라엘과 평화공존하는 길을 찾게 되었다.

이런 이스라엘과 PLO의 직접교섭 끝에 1993년 오슬로합의와 팔레스타인 잠정자치협정에 근거해 팔레스타인 잠정자치구가 설립되었다.

그러나 오슬로합의에 대한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측의 불만이 강했다. 또 요르단강 서안지구는 현재도 팔레스타인자치정부의 지배권이 미치는 지역이 절반도 안된다. 나머지는 이스라엘 점령 아래 있다. <계속> 

sopulgo@jay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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