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운정의 길 따라...] 곡성에서 구례 지나 하동까지

하동 벚꽃마을.
하동 벚꽃마을.

요며칠 비가 내려 봄이 더욱 깊어졌다. 들에는 아지랑이가 몽환처럼 피어 오르고, 공기는 말랑거리고 따뜻해서 아기 손바닥을 볼에 대고 있는 것만 같다. 이번 여행은 섬진강을 따라 간다. 곡성에서 시작해 구례를 지나 하동까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봄 속으로 들어간다.

많은 이들이 섬진강하면 하동을 떠올리지만 곡성의 섬진강도 못지 않게 유명하다. 전북 임실에서 시작한 섬진강은 골짜기와 마을을 지나며 셀 수 없는 실개울들을 만나고, 곡성에 이르러 비로소 강다운 모습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구례를 지나 하동으로 흘러간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전라도에서 섬진강 유원지라고 하면 곡성의 압록을 뜻했다. 그땐 압록 앞에 너른 모랫벌이 펼쳐졌다. 거기서 은어도 잡고, 참게도 잡으며 사람들은 놀았다. 곡성(谷城)이라는 이름 역시 산과 강 사이에 계곡이 많아 붙었다.

요즘 여행자들은 기차타러 곡성에 온다. 칙칙폭폭 새하얀 수증기를 내뿜으며 달리는 증기기관차다. 곡성역에서 약 1km 떨어진 곳에 옛 곡성역이 있는데 이곳에 가면 새까만 증기기관차를 실제로 타볼 수 있다.

옛 곡성역은 1933년, 일제 강점기에 세워졌다. 익산역에서 출발해 여수역까지 이어지는 전라선의 한 역이었다. 전라도의 곡식을 실어가기 위해 만든 역이라고도 하고 섬진강의 고운 모래를 실어가기 위해 만든 역이라고도 한다. 한때 ‘곡식 곡(穀)’자를 써 곡성을 표기했다니 얼마나 땅이 비옥하고 물산이 풍부했는지 짐작해볼 수 있다.

철길은 섬진강변을 따라 가느라 구불구불했고 열차는 속도를 내지 못했다. 빠른 것만 원하는 이 시대에 느리고 느리게 가는 기차를 사람들은 가만 놔두질 않았다. 결국 뒤편 산자락에 터널을 뚫고 빠른 새 길을 냈다. 1999년 곡성역은 곡성읍으로 자리를 옮겼다. 옛 곡성역은 폐선된 철로와 함께 철거 위기에 놓였지만 다행히 곡성군이 철도청으로부터 자산을 매입해 곡성~가정 구간에 증기기관차를 다니게 했다. 지금은 섬진강 기차마을이라는 이름의 관광지로 다시 태어났다.

기차마을은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드라마 <서울 1945>·<사랑과 야망> 등의 무대가 됐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진태(장동건)와 진석(원빈) 두 형제가 징집열차에 오르면서 가족들을 애타게 부르던 모습을 바로 이곳에서 찍었다.

섬진강 기차마을을 지나면 옛 전라선 철길을 따라 강이 함께 한다. 17번 국도도 나란히 달린다. 이 부근의 섬진강은 곡성천·금천천·고달천과 만나 거대한 습지를 이루는데, 이곳이 바로 침실습지다. 약 200만 ㎡ 규모로 형성된 습지에는 수달과 삵·남생이·흰꼬리수리 같은 멸종 위기 야생 동물이 살아간다.

하동 억양들판.

길은 곧 구례로 접어든다. 구례에는 조선시대 3대 명당자리로 불리는 운조루가 있다. 풍수지리학적으로 최고의 명당터라는 ‘금환락지’에 자리잡고 있다. 선녀가 지상으로 내려와 목욕을 한 뒤 다시 하늘로 날아오르다 금가락지를 떨어뜨린 길지라는 뜻이다. 부귀영화가 샘물처럼 마르지 않는 풍요로운 곳이라고 한다.

운조루는 쌀 두 가마 반이 들어가는 통나무 쌀뒤주와 난쟁이 굴뚝으로 오가는 사람들을 불러들인다. 행랑채에 커다란 나무 뒤주가 있는데 이 뒤주 아래에 붙은 구멍 마개에는 ‘타인능해’(他人能解)라는 붓글씨가 또렷하게 씌어 있다. ‘아무나 마개를 풀어 쌀을 가져가라’는 뜻이다. 가난한 이들에게 나눔을 베푼 상징물이다. 운조루는 굴뚝도 낮은데 이는 밥 짓는 연기가 담을 넘어 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섬진강의 봄은 하동에서 절정에 달한다. 악양들판 보리밭은 찬란한 봄햇살을 받으며 키를 쑥쑥 키운다. 강마을 사람들은 강으로 나가 재첩잡이를 시작하고, 비탈마다 자리한 찻집에선 밤을 밝혀 차를 덖는다.

여기는 섬진강이 내려다보이는 산비탈에 자리한 자그마한 다원이다. 어젯밤 늦게 하동에 도착해 이곳에서 하루를 머물렀다. 하동은 국내 최대의 야생차 재배지다. 화개골 가파른 계곡 기슭 곳곳에 차밭이 만들어져 있다. 안개가 많고 일교차가 큰 하동은 차나무가 자라기 좋은 환경을 갖추고 있다.

하동차는 증기로 쪄내는 다른 지역과 달리 차를 ‘덖는’ 방식으로 만든 수제 녹차다. 맑은 날 잎을 따 무쇠솥에 찻잎을 덖은 후 멍석에다 비비고 말리는데, 찻잎을 멍석에 비비는 이유는 일부러 상처를 내 찻물로 다릴 때 더 진한 향이 배어나오도록 하기 위해서다. 생산량은 많지 않지만 그만큼 정성이 가득 담겨 있다. 차밭도 우리가 흔히 보아오던, 가지런히 줄을 맞춘 녹차밭과는 다르다. 화개장터 입구에서부터 쌍계사를 지나 신흥까지, 볕이 잘 드는 산기슭을 따라 듬성듬성 만들어져 있는데, 그 길이가 장장 12km에 이른다고 한다.

하동 야생차밭.

차 한 잔으로 목을 축였다면 평사리로 가보자. 이름만큼이나 거대한 소설 <토지>의 무대가 됐던 곳이다. 소설에 나오는 ‘최참판댁’이 그대로 재현되어 있다. 3,000여 평 대지에 지어진 14동의 한옥은 조선시대 양반집을 그대로 재현했다. 윤씨 부인과 서희가 기거했던 안채와 길상이를 비롯한 하인들이 머물렀던 행랑채, 최치수가 머물던 사랑채 등이 잘 정돈되어 있다. 최참판댁은 많은 이들이 원래부터 있던 집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사실은 원래 있던 집이 아니라 SBS 대하드라마 <토지>를 촬영하기 위해 만든 야외 세트장이다. 길상과 떠억 마주칠 것같은 낯익은 담벼락을 돌면 안채 마루에는 윤씨부인이 앉아 환한 웃음으로 반겨줄 것 같다.

봄꽃 만큼이나 사람을 즐겁게 하는 것이 하동의 봄 별미들이다. 하동의 봄은 4월 중순 재첩잡이로 무르익는다. 요즘은 수확량이 많이 줄었지만 아직도 모래밭에선 재첩이 그득히 올라온다. 4월 중순 지나면 아낙들은 그리 깊지 않은 모래톱을 찾아 반쯤 몸을 담그고 재첩을 걷기 시작한다. 조금 깊은 강 한복판에서 모랫속의 재첩을 건져올리는 재첩배도 보인다. 맑은 섬진강 물에서 자란 재첩은 맛이 좋다. 수입산 재첩으로 끓인 재첩국은 식으면 비린내가 나는데 섬진강 재첩국은 냄새가 전혀 나지 않는다.

벚꽃 필 무렵 올라오는 벚굴도 봄 별미 중의 별미다. 섬진강이 바다와 만나는 지점에서 자라는 초대형 굴로, 크기가 10~20cm에 달한다. 알맹이도 어른 손바닥만큼이 크다. 맛도 우리가 흔히 먹는 굴과는 다르다. 짭조름한 맛이 훨씬 강하다. 식감도 한층 쫄깃하다. 바닷굴에 꼬막을 합쳐 놓은 맛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주로 구이로 먹는데 튀김, 전, 찜 등으로 먹어도 맛있다.


[여행정보]

하동 참게장.
하동 참게장.

호남고속도로 곡성IC로 빠져나와 15분쯤 달리면 기차마을이다. 섬진강기차마을(061-363-9900, www.gstrain.co.kr) 참조. 구례 화엄사 입구에 산채를 잘하는 집이 많은데, 화엄사 입구에 몰려 있다. 동아식당(061-782-5474)은 가오리찜으로 유명하다. 하동 화개골에 자리한 차밭을 따라가다 보면 쌍계사에 닿는다. 범패(梵唄)의 발상지로도 잘 알려져 있다. 평사리 최참판댁은 대하소설 <토지>의 무대가 됐던 곳이다. 하지만 박경리 선생은 평사리에는 한 번도 오지 않았다고 한다. 하동은 재첩국이 유명하다. 맑은 물에서만 잡히는 재첩은 4~5월이 가장 맛있다. 국물을 끓이면 뽀얀 우윳빛이 돈다. 하동읍 신기리에 재첩특화마을이 조성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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