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광
장석광

한 손에 총을 든 채 문을 여는 것과 동시에 스위치를 올렸다. 텅 빈 방이 그를 맞이했다. 저녁식사 전 서랍에 끼워둔 검은 머리카락 한 올이 그대로 있는지 살폈다. 옷장 손잡이 안쪽에 희미하게 뿌려 놓았던 파우더의 상태를 확인했다. 변기 뚜껑을 열고 미리 표시해둔 그 높이 그대로 물이 차 있는지도 점검했다. 완벽했다. 침입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한 벌에 6천 달러짜리 수트를 입고, 베스퍼 마티니(Vesper Martini)를 즐긴다. 밤새 수백만 달러를 도박으로 잃고도 눈도 깜짝 않는다. 어둠 속 310야드 거리에서 KGB 요원을 저격하는 사격솜씨는 기본 중 기본. 40대 중반 나이에도 ‘시계 폭탄’ ‘글로벌 감시시스템’ 같은 첨단장비 조작도 능수능란하다. 아무리 바빠도 미녀와의 로맨스는 빼 놓을 수 없는 필수 코스.

‘007 제임스 본드’는 MI6 요원이었던 이언 플레밍이 소설에서 창조한 스파이의 전형이다. 사무실에 있는 시간이 많았던 내근요원 플래밍이 생각한 이상적인 현장요원이었다. 비밀요원에게 술과 여자, 도박은 금단의 과일이요 치명적인 독이다. 소설은 그저 소설일 뿐. 소설을 소설로 읽지 못하고, 영화를 영화로 보지 못했던 어느 정보기관장은 전날 저녁 방영한 스파이 드라마 얘기로 아침 회의를 시작했다. 참모들은 정보의 ‘정’자도 몰랐던 정보기관장이 어떻게 그렇게 빨리 정보 전문가가 될 수 있었는지 그 영민함과 통찰력, 박식함에 놀라움과 찬사를 보냈다. 정보기관장은 자기 요원들을 들볶기 시작했고, 정보기관은 망가지기 시작했다.

다음은 소설이나 영화가 아닌 현실 속 스파이들의 몇 가지 에피소드다. 북한 스파이들은 대개 집안도 좋고 장기간 전문 교육을 받아 자존심이 아주 강하다. 90년대 중반 직파된 스파이 한 명이 체포되었다. 은신처에서 독약 앰플, 무전기, 통신 문건, 권총이 발견되었다. 한 주일쯤 지나 수사관과 정이 들락말락 한 어느 날 "체포될 당시 왜 권총을 휴대하지 않고 있었냐?"고 물었더니 "죽기 싫어서! 총격전이 벌어지면 총 가진 사람이 먼저 죽잖아요."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던 그가 인간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대제국을 거느려 본 영국 정보기관은 꼬장꼬장한 영국식 액센트에서 거만함이 저절로 묻어 나온다. 우방국과 정보협력도 원칙에서 절대 벗어나지 않는다. 한 쪽에서 밥을 사면 리턴 매치는 글로벌 인지상정인데도 리턴이 돌아오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선물도 골프공 세 개 아니면 축구공 하나! 마음 씀씀이가 쪼잔하다. 모범생 스타일이지만 지극히 실무적이다. 영화 속 ‘제임스 본드’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자기 기관 출신이 대통령으로 있는 러시아 정보기관은 딱 자기 대통령을 닮았다. 일인지하 만인지상 안하무인이 몸에 뱄다. 손님을 초청해 놓고 약속 시간을 지키지 않는 것은 흔하디흔한 일상. 손님은 뒷전인 채 스스로 상석에 앉아 자기 상사 기분 맞추는 데 급급하다. 화이트 요원들이 신분증 까고 모처럼 스트레스 해소하는 술자리까지 카메라를 들이댄다. 선수들끼리 매너가 똥 매너다.

2500여 년 전 이미 정보활동의 교리를 완성한 중국 정보기관은 손님 대접은 성대한데 진짜 속마음은 알 길이 없다. 대접을 할 때도 요원 여러 명이, 대접을 받을 때도 여러 명의 요원이 나온다. 한 사람이 말을 하면 한 사람은 받아 적는다. 서로가 서로를 견제한다. ‘월리를 찾아라’(Where’s Wally?) 누가 월리인지 찾기 어렵다. 이런 시스템에선 주인이나 손님이나 누구도 선뜻 속마음을 내놓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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