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 이승만의 일생과 동아시아 역사

이승만 국장에 조사 바친 박정희 ‘선구자·혁명아·건국인’ 평가

류석춘
류석춘

이승만은 1875년 태어나 1965년 돌아갔다. 만 90년의 삶이다. 같은 시대에 태어난 사람들 중 이만한 장수를 누린 사람이 흔치 않다. 100세 시대라는 요즘에도 90대 나이에 돌아간 분의 상가에 가면 호상(好喪) 즉 ‘복을 누리며 오래 사신 분이 돌아가셨네요’라는 인사말을 한다. 그러나, 이승만 90년 삶은 개인적 호사(好事)만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가 만든 나라 대한민국의 호사였다.

이승만이 태어난 1875년, 중국은 만주족이 세운 청(淸)나라의 11대 황제 광서제(光緖帝)가 만 4살로 즉위한 해다. 그러나 즉위하면서부터 6년은 적모(嫡母) 동태후(東太后) 그리고 다시 그 후 8년은 큰 이모인 서태후(西太后)가 섭정을 했다. 광서제는 18살이 되던 해부터 9년간 친정(親政)을 하기도 했으나, 27살이 되면서 다시 서태후에 실권을 뺏겨 1908년 37살의 나이로 죽을 때까지 허수아비 황제로 유배생활을 해야 했다. 한마디로 중국은 엉망이었다.

그러나 1875년 일본은 달랐다. 메이지(明治) 유신 8년째였다. 1868년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는 샤쯔마번(薩摩藩, 오늘날 가고시마현)과 조슈번(長州藩, 오늘날 야마구치현) 사이의 샤초동맹(薩長同盟)을 이끌며 지방 분권을 유지하려는 막부 권력에 대항해 천황 중심의 중앙집권 근대 국가로 일본을 근본부터 바꾸고 있었다.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가 나이 40에 ‘일신(一身)이 독립해야 일국(一國)이 독립한다’는 명언을 담아 『문명개략』 (文明之槪略)을 출판한 해가 바로 1875년이다.

1948년 7월 24일 초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연설하는 이승만.
1948년 7월 24일 초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연설하는 이승만.

1875년, 이승만이 태어난 조선은 고종 12년이었다.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첫 단추 강화도 조약이 체결된 바로 그 해다. 재위 34년 내내 고종은 아버지 대원군과 부인 민씨 사이의 갈등에 휘둘려 청·일·러 주변 강대국들의 도발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다. 서양 열강의 먹이가 된 중국과 판박이 모습이었다. 500년 왕조를 지키지 못한 고종은, 그러고도 1910년 합병 후 일본 천황 아래 조선 왕 ‘이태왕’(李太王)으로 대접받으며 포시랍게 살다가 3.1 운동 직전인 1919년 1월 67년의 생을 마감했다.

그로부터 90년 후 이승만이 땅에 묻힌 1965년은? 모택동의 중공과 장개석의 대만으로 분리된 두 개의 중국이 금문도 앞바다에서 무력충돌을 한 해다. 결과는 모택동의 참패였다. 중공은 중앙 권력이 일방적으로 생산량 할당을 높이며 강제로 노동력을 동원한 사회주의 경제발전을 추구했다. 1958년부터 1962년까지 전개된 이른바 ‘대약진운동’은 그러나 참혹한 실패로 끝났다. 공식 통계만으로 2200만이 굶어 죽었다. 심지어 5000만 이상이 아사(餓死)했다는 관측이 유력하다.

이 일로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없었던 모택동은 주석에서 내려왔다. 그러나 대약진운동의 실패를 문제 삼는 개혁파를 상대로 모택동은 1966년부터 ‘문화대혁명’이라는 또 다른 공산주의 반동을 10년이나 밀어붙였다. 홍위병이 춤을 추며 적게는 수십만, 많게는 2000만을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또 죽었다. 1976년 등소평이 집권해 개혁·개방으로 방향을 틀 때까지 ‘죽의 장막’ 뒤 중공은 지옥이었다.

그렇다면 1965년 일본은? 눈부신 전후복구가 진행되던 때다. 올림픽 사상 처음으로 아시아에서 열린 1964년 동경올림픽이 성공하면서 일본은 국제사회의 중요한 일원으로 돌아왔다. 1965년 매듭지은 ‘한일국교정상화’는 일본이 식민지 조선에 두고 간 민간의 사유재산마저 모두 포기한 자신감을 배경으로 성사될 수 있었다. 2021년 현재 아직도 미진한 부분이 있다며 일본을 상대로 배상을 요구하는 우리의 징징대는 모습과 완전히 딴판이었다.

1965년 대한민국은? 5.16으로 정권을 잡아 대한민국 5대 대통령이 된 박정희가 하와이에서 죽음을 맞은 이승만 건국 대통령을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치하는 국장이 치러진 해다. 박정희가 한강의 기적을 내다보며 달리기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1965년 7월 27일, 그가 읽은 조사는 지금도 우리 가슴을 울린다. 몇 대목이라도 소개하지 않을 수 없다.

"일찍이 대한제국의 국운이 기울어가는 것을 보고 용감히 뛰쳐나서 조국의 개화와 반(反)제국주의 투쟁을 감행하던 날, 몸을 철쇄로 묶고 발길을 형극으로 가로막던 것은 오히려 선구자만이 누릴 수 있는 영광의 특전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일제의 침략에 쫓겨 해외의 망명생활 30여 성상에 문자 그대로 혹은 바람을 씹고 이슬 위에 잠자면서 동분서주로 쉴 날이 없었고, 또 혹은 섶 위에 누워 쓸개를 씹으면서 조국광복을 맹서하고 원하던 것도 그 또한 혁명아만이 맛볼 수 있는 명예로운 향연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마침내 70 노구로 광복된 조국에 돌아와 그나마 분단된 국토 위에서 안으로는 사상의 혼란과 밖으로는 국제의 알력 속에서도 만난을 헤치고 새 나라를 세워 민족과 국가의 방향을 제시하여 민주한국 독립사의 제1장을 장식한 것이야말로 오직 건국인만이 기록할 수 있는 불후의 금문자였던 것입니다."

이승만의 90평생이 지나가는 동안 중국에서는 전통 왕조가 신(神)을 죽이고 등장한 근대 ‘공산주의’라는 악마에게 자리를 뺐겼다. 반면, 같은 기간 일본은 서양의 근대를 추격하던 제국주의가 원자폭탄으로 끝장나고 대신 ‘자유민주주의’에 기초한 ‘세계 최고 일본’ (Japan as number one)이 들어섰다. 조선은 식민지를 거쳐 해방과 독립을 차례로 맞았고, 마침내 당신이 건국한 ‘자유 대한민국’은 ‘한강의 기적’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그 사이 북한은 듣도 보도 못한 ‘왕조 공산주의’라는 괴물을 잉태했다. 이승만 90년 세월에 대한민국만 운명이 바뀌고 있었다.

1965년 7월 27 이승만 대통령 장례 행렬에 거리에 나와 애도하고 있는 시민들.
1965년 7월 27 이승만 대통령 장례 행렬에 거리에 나와 애도하고 있는 시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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