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구영
정구영

국가의 경제활동을 의미하는 재정(財政)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예산(豫算)이다. 재정은 조세, 지출, 공채(公債)관리의 3가지 수단에 의해 이뤄지지만 모든 것이 예산을 축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예산의 핵심 기능은 사회적 후생이 최대화될 수 있도록 한정된 자원을 배분하는 것이다. 소득 재분배 기능도 있다. 빈곤층에 대한 생계지원, 실업급여 등 최저생활 보장은 사회 통합에 기여한다. 예산은 또 경제를 안정시키는 기능도 수행한다. 한마디로 예산은 국가 운용의 ‘청사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같은 중요성 때문에 내각책임제 국가에서는 예산안이 의회에서 부결될 경우 내각 불신임 결의로 간주돼 의회 해산이 뒤따르게 된다.

국회는 지난 3일 607조7000억원 규모의 2022년도 예산안을 처리했다. 여야 합의에 실패, 법정처리 시한을 하루 넘겨 여당이 독자적으로 마련한 수정안으로 통과됐다. 내년 예산은 올해보다 8.9% 늘어난 ‘슈퍼 예산’이다. 지난 2017년 400조7000억원이었던 예산 규모가 5년 만에 200조원 이상 불어난 것이다. 문재인 정부 들어 지난해까지 연평균 성장률은 1.63%에 그쳤다. 그럼에도 해마다 예산을 8~9% 늘려온 결과 문재인 정부 출범 직전 600조원 수준이던 국가채무는 내년에 1070조원으로 늘어난다.적자국채 발행을 일삼은 탓이다.

예산을 써야 할 때 제대로 쓰지 못하면 민생은 더 어려워진다. 성장 잠재력도 갈아먹을 수 있다. 지금 한국경제는 물가가 오르는 와중에 경기는 침체하는 스태그플레이션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는 상태다. 문제는 예산이 제대로 쓰이는 지 여부. 내년 예산안에는 대선(大選)과 지방선거를 앞두고 선심성 사업이 대거 포함됐다. 지역화폐 발행과 각종 현금성 수당이 대표적이다.

당초 기획재정부는 내년 지역화폐 발행 물량을 6조원 규모로 잡았다. 하지만 이를 확대해 달라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의 요청으로 무려 5배 증가한 30조원으로 늘렸다. 이에 따라 관련 예산 역시 6052억원으로 확대됐다. 발행지역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지역화폐는 액면가를 10% 할인해 판매하는데, 이 차액을 정부가 예산으로 보조한다. 하지만 법정화폐와 달리 관리 주체가 없어 부정 유통을 감시하거나 자금흐름을 관리하기 어렵다. 지역 간에 불필요한 복지경쟁을 부추길 수도 있다. 특히 지역화폐의 경제적 효과가 입증되지 않았다.

국책연구기관인 한국조세재정연구원은 지난해 9월 다양한 손실과 비용으로 ‘역효과’를 초래한다는 보고서를 냈다. 경기도 싱크탱크인 경기연구원의 지역화폐 효과분석 결과에 대해서도 ‘과대 추정’됐다고 지적했다. 전국을 대상으로 하는 온누리상품권과 달리 사용처가 제한돼 자원의 효율적 배분이 떨어지며, 지역 매출 효과 역시 슈퍼마켓 등 일부 업종만 본다는 것이다. 그러자 당시 경기도지사였던 이재명 후보는 얼빠진 국책연구기관이라고 맹비난한 뒤 조사와 문책을 거론했다. 이 탓인지 그해 12월 나온 최종 보고서에서는 지역화폐에 대해 부정적으로 언급된 내용이 모두 빠지거나 수정됐다.

세금은 국가가 예산을 마련하기 위해 국민으로부터 걷는 돈이다. 흔히 혈세(血稅)로 표현된다. 하지만 집값 폭등으로 수 십조원의 세금을 거두고도 나랏빚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이는 세금을 눈 먼 나랏돈으로 보기 때문이다. 선거를 위해 나라 곳간을 이용하는 것인데, 이는 표심(票心)을 도둑질하는 행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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