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나 글로벌 경제위기가 터졌을 때 안전자산으로 인정받았던 엔화의 가치가 급락하고 있다. 서울 중구 하나은행 딜링룸에서 한 딜러의 컴퓨터 모니터에 전쟁과 외환시장에 관한 리포트가 나와 있다. /연합

미국 달러, 스위스 프랑과 함께 대표적 안전자산으로 꼽히던 일본 엔화의 가치가 급락하고 있다. 넉넉한 외화자산과 경제의 탄탄한 기초체력을 배경으로 전쟁이나 글로벌 경제위기가 터졌을 때 오히려 가치를 인정받았던 엔화가 최근 들어 정반대 흐름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지난 8일 외환시장에서 달러당 엔화 환율은 124.06엔으로 지난 2015년 이후 7년 만에 최저 수준을 기록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시작된 2월 말 이후 달러 대비 엔화는 6% 넘게 하락했는데, 이는 주요국 통화 가운데 터키 리라화 다음으로 낙폭이 큰 것이다.

원·엔화 환율의 가늠자로 통하는 ‘100엔=1000원’마저 무너졌다. 같은 날 원·엔화 환율은 100엔당 987.55원을 기록했다. 1000원으로 100엔 이상과 바꿀 수 있다는 것인데, 100엔당 원화가 1000원 아래로 내려간 것은 지난 2018년 12월 이후 3년여 만이다.

이처럼 엔저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 미국과 일본의 통화정책 차별화 때문이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는 내년까지 기준금리 인상과 함께 양적 긴축에 나서는 등 통화긴축을 예고했다. 하지만 일본은행은 경기부양을 위해 저금리 기조와 완화적인 통화정책을 유지하겠다는 입장이다.

일본의 지난 2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0.9%에 그쳤다. 전 세계적으로 인플레이션이 나타나고 있지만 일본은 장기 저성장을 지속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은행이 국채를 계속 매입해 10년물 국채 금리 0%대를 유도하려는 완화적 통화정책을 지속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미국 등 주요국이 정책금리를 올리며 긴축에 들어가는데 일본만 저금리 기조를 고집하면서 외국인 투자금이 해외로 빠져나가고 있다.

오는 7월 참의원(상원) 선거를 앞두고 있어 경기부양에 나서야 하는 것도 요인이다. 엔화가 약세일 경우 가뜩이나 높은 에너지 수입가격을 더 끌어올린다는 문제가 있다. 하지만 일본 금융당국은 현재의 통화정책을 유지하는 것이 경제에 더 이롭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엔화의 안전자산 지위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는 평가도 있다. 실제 우크라이나 사태와 국제유가 폭등으로 글로벌 금융시장이 휘청이고 있지만 엔화를 찾는 외국인 투자수요는 많지 않다. 이에 따라 일본 내에서 환율 방어선으로 알려진 ‘1달러=125엔’이 무너지는 것은 물론 ‘1달러=150엔’이라는 시나리오도 나오고 있다. 현재 일본은 초고령화와 저성장, 세계 2위의 부채 비율, 17개월째 이어지는 경상수지 적자 등의 악재가 이어지고 있다. 이 같은 상황이 엔화가치에 반영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원화 역시 만성적인 불안에 시달리고 있다. 통화가치가 안정되지 못하고 국내외 정세나 외환사정에 따라 요동친다는 것이다.

국제금융연구소(IIF)가 지난해 11월 공개한 ‘글로벌 리스크에 대한 원화의 민감도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원화는 과거 국내외 위기를 겪으면서 큰 취약성을 드러냈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 원화가치는 57% 추락했고,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는 42% 하락했다. 급락한 통화가치를 회복하는 데도 다른 나라 통화보다 오래 걸렸다.

이번 코로나19 사태에서도 원화가치의 불안정성은 두드러지게 드러났다. 2020년 3월 코로나19 사태가 본격화될 무렵 원·달러 환율이 크게 치솟았는데, 미국과의 6개월 기한 통화교환 협정을 체결한 후에야 환율 불안이 간신히 잦아들었다.

지난해 역시 원화가치는 하락세를 면치 못했다. 한국은행이 지난 1월 내놓은 ‘최근 원화 약세 원인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2021년 원·달러 환율 상승률 8.2%는 신흥국의 2.7%보다 3배 이상 높았다.

올 들어서도 원·달러 환율은 불안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한국은행은 국제 원자재 가격 상승, 높은 중국경제 의존도, 외국인 투자금 유출 등을 주된 이유로 제시했다. 여기에 기준금리를 한번에 0.5%포인트씩 올리는 미 연준의 빅스텝과 양적 긴축이 본격 시작되면 본원통화량 자체가 줄기 때문에 수급 측면에서 달러 강세 흐름이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이 같은 요인들을 감안하면 원화가치는 국내외 리스크가 발생할 때마다 민감하게 움직일 공산이 크다. 특히 추가경정예산 편성 남발 등 재정을 방만하게 운영하면 원화가치는 더 추락하게 된다. 원화가치 안정은 견고한 경제 흐름의 전제 조건이다. 윤석열 정부에 주어진 과제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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