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北송환 이인모는 종군기자 아닌 정치공작대
1993년 北송환 이인모는 종군기자 아닌 정치공작대
  • 유진
  • 승인 2018.04.30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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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대한민국 '북송 1호' 비전향 장기수 이인모

이인모(1917.8.24~2007.6.16)는 지난 1993년 김영삼 정부 출범 이후 북한으로 송환된 비전향장기수다. 북송 1호인 셈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의하면 이인모는 한국전쟁 당시 종군기자로 활동하다 미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북한군이 남쪽에 고립되면서 지리산으로 들어가 빨치산 활동을 하던 중 검거되어 7년간 복역했다.

이인모와 그의 가족.
이인모와 그의 가족.

그러다가 1959년 출소한 후 1961년 부산에서 지하당활동 혐의로 붙잡혀 15년형을 선고받아 실형을 살고 두 차례 더 복역하는 등 총 34년간 옥살이를 한 뒤 1988년 석방되었다.

그 후 북한은 1991년 9월 평양방송을 통해 이인모의 송환을 요구했다. 1992년 개최된 남북고위급회담에서도 이인모의 송환을 줄기차게 주장하였다. 그러던 중 1993년 3월 19일 김영삼 정부는 그를 북한으로 송환했다.

김일성과 김정일의 환대를 받는 이인모.
김일성과 김정일의 환대를 받는 이인모.

◇김정일, 송환된 이인모 부총리급 대우

김정일은 이인모가 송환되자 대대적인 연도환영식을 열고 맞이했다. 또 그를 ‘신념과 의지의 화신’으로 치켜세우면서 공화국영웅 칭호를 수여하고 부총리급 대우도 해주었다.

그러나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것과 달리 이인모는 종군기자가 아니었다. 이인모는 6.25전쟁 초기에 정치공작대원으로 남파된 북한노동당 간부출신 공작원이었다.

1993년 3월 13일 판문점을 통해 북으로 가는 미전향 장기수 이인모를 환영하는 북한 관계자들.
1993년 3월 13일 판문점을 통해 북으로 가는 미전향 장기수 이인모를 환영하는 북한 관계자들.

이인모는 8.15광복 이전까지는 고향인 함경남도 풍산(현 양강도 김형직군)에서 반일운동을 했고 광복 이후에는 함경남도 신포로 나와 거기에서 군당 선전부 간부를 역임했다. 그러다가 6.25전쟁이 터지자 정치공작대에 선발되어 북한군이 점령했던 전라도 지역에 파견돼 노동당과 인민위원회를 조직하고 토지개혁을 실시하는 등 공작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미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 및 한미연합군의 서울 수복으로 더 이상 남쪽 지역에서 노동당 간부로서 활동을 할 수 없게 되자 지리산으로 들어가 빨치산 대원들을 김일성과 북한정권에 충성하도록 교양하는 유격대정치부 선전선동담당 간부로 활동했다.

이인모의 북한 송환을 34년만의 귀향으로 보도한 신문. 이때도 그는 종군기자로만 알려졌다. 북한의 철저한 공작이 남한 언론에 먹힌 셈이다.
이인모의 북한 송환을 34년만의 귀향으로 보도한 신문. 이때도 그는 종군기자로만 알려졌다. 북한의 철저한 공작이 남한 언론에 먹힌 셈이다.

그때 빨치산 대원들의 충성심을 자극하는 기사도 썼는데, 그것을 이유로 검거된 후 자신이 '종군기자'라고 우긴 것이다. 그러나 전쟁 당시의 이인모 역할에 대해 대한민국 재판 기록에는 의용군 강제 모집이나 빨치산 활동 등이 적시되어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북한에서 파견된 정치공작대와 그에 의해 조직된 각급 인민위원회가 의용군 강제 모집 등을 담당하고 있었던 점을 고려하면 이인모가 정치공작대로 파견된 간부였음을 알 수 있다.

송환 10년을 맞은 비전향장기수 이인모씨가 19일 평양 만수대 김일성 주석의 동상 앞에서 꽃다발을 바치고 있다
송환 10년을 맞은 비전향장기수 이인모가 2003년 3월 19일 평양 만수대 김일성 주석의 동상 앞에서 꽃다발을 바치고 있다

빨치산 활동을 하던 이인모가 군경에 검거된 것은 1952년이다. 그 후 7년간 복역하다 1959년에 출소한 뒤 얼마 안 돼 바로 북한노동당 대남공작부서와 연계되어 지하당조직 활동 즉, 간첩활동을 했다. 이인모가 간첩활동을 하다 검거된 시점이 1961년이니까 출소 후 바로 북한노동당과 연계된 셈이다.

만약 이인모가 노동당 간부로 활동하다 정치공작대원으로 선발되어 파견된 능력 있는 공작원이 아니었다면 그가 출소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노동당 연락부에서 간첩을 그에게 보내 연계를 맺고 지하당을 조직하라는 임무를 주지 않았을 것이다.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김정일은 1990년대 초반 북한이 이인모의 송환을 추진할 때 이인모를 파견하고 그가 출소한 뒤 다시 연계를 맺고 임무를 주었던 노동당 사회문화부(구 연락부)는 뒤로 빠지도록 하였다.

이인모의 부인과 딸들.
이인모의 부인과 딸들.

◇이인모에게 철저히 종군기자 행세하라 종용

그리고는 이인모의 임무수행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노동당 통일전선부가 전면에 나서서 이인모 송환문제를 주도했다. 또 이인모에게도 연락을 보내 한국전쟁 당시 직업을 철저히 '종군기자'라고 주장하도록 종용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인모가 북한에 송환된 다음에는 원래 그를 파견하고 조종했던 노동당 사회문화부가 그의 신병을 관리하며 그로부터 한국에서 진행한 공작결과를 모두 보고받은 다음 통일전선부에 넘겨 북한주민들을 상대로 한 선전선동에 활용했다고 한다.

이와 같은 내용은 늦은 감은 있지만 지금이라도 이인모에 대한 인식을 바로 가질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 언급한 것이니 독자들이 이해해주기 바란다.

yj@jay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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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원이 2019-07-02 14:22:25
송환 당시에 이미 폐렴을 앓아 투병 중이었던 리인모는 2003년 9월 이후부터 사망한 2007년 6월 16일까지의 행적을 언론에서 이름을 찾기가 힘들다. 그 이유가 투병 때문인지 북한 당국에 밉보여서인지 불명확하다. 식물인간 상태라는 리인모가 북송 후 10년째 살고 있어 놀랍다는 한완상의 증언은 인상적이다.

소원 2018-05-14 21:10:58
이 기사 유용하게 잘 봤습니다.

남한에서 34년 옥살이 한 이인모가 사리원교화소(모범)를 참관하고 남긴 말이 생각나네요....ㅠ
"이런 시설이였다면 난 아마 몇년을 버티지 못하였을 것이다. 라고 !!!!!